박혁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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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혁거세왕에 관하여... 

    ♣ 시조왕사적 (역문)

          王의 姓은 朴이요 諱(휘)는 혁거세이다. 聖母(성모)의 휘는 婆蘇(파소)인데 본래 漢(한) 宣帝(선제)의 公主(공주)로

           仙術(선술)을 배워東(동)으로 海上(해상)에서 노닐다가 경주 선도산에 이르렀다. 地節(지절)元年(원년)(왕자 )

           서기 기원전 619년에 큰알를  낳아 楊山(양산)기슭蘿井(나정)숲에 두었다.  

           이때 高虛村長(고허촌장)이 멀리 서광이 뻗친 것을보니 마치仙人(선인)이 엎드려 절하고있는 모습갔았다.

           아윽고 알을 깨고 男兒(남아)를 얻으니 형체가 단정하였다.  東川(동천)에서 목욕시키매 몸에서 광채가 나고새나 짐승들이

           모여들어 춤을 추었다. 六村(육촌)사람들은 그 출생이 하도 기이하여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나이 열셋에 의젓함이 어른같아

           육촌장들에게 추대되어 임금이 되었다. 王號(왕호)를 居西干(거서간)이라고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는데

           때는 五鳳(오봉)元年甲子(원년갑자)서기전 517년 4월이었다. 5년봄 正月(정월)閼英(알영)씨를 왕비를 맞았는데

           왕비의 출생도 역시 祥瑞(상서)로웠다.

          즉 龍(용)이 閼英井(알영정)에 나타나오른쪽 겨드랑이에서 女兒(여아)를 낳으므로 한 할미가 이상히 여겨 거두어 기르고  

          샘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불렀다. 자라서 왕비가 되어서는 어진德(덕)으로  왕을 잘 보필하니 國人(국인)이 二聖(이성)이라고

          칭송하였다. 왕8년에 왜병이 국경을 침범하려다가  왕의 神德(신덕)을 듣고 곧 물러갔으며

          17년에는 왕과 왕비가 六部(육부)를 돌아보고 農桑(농상)을 권장하였다.

          19년에는 弁韓(변한)이 항복해오고 21년에는 王京(왕경)의 城(성)을 쌓고 金城이라 불렀으며

          26년에는 비로소 王官(왕관)을 지었다.

          30년에는 樂浪人(낙랑인)이 노략질을 하려고 왔다가 國境(국경)에 들어서서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들에는 露積(노적)가리가많은 것을보고 서로 말하기를 『道(도)가 있는나라이니 범할 수 없다』 徹兵(철병)해 돌아 갔다.

          38년에는 瓠公(호공)을 馬韓(마한)에보내어 수교하게 되었는데 그 왕이 事大(사대)의 예를 責望(책망)함으로 호공이

          응수하기를『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나라를 일으켜 인사에 질서있으므로 天時(천시)가 和(화)하고 창고가 가득하여

          백성들은 겸양합니다. 그리하여 辰韓(진한),弁韓(변한),樂浪(낙랑),倭人(왜인)들은 모두 畏服(외복)아니함이 없지만

          우리 왕께서는 겸허하여 小臣(소신)으로 하여금 수교를 하게하니 예에 지나치다고 할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馬韓(마한)왕이  노하여 죽이려고 하다가 左右(좌우)의 만류로 그만 두었다. 해를 넘겨 이듬해에 마한왕이 돌아 가므로

          어떤이가 왕께 권유하기를 전에 마한왕이 우리 사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지금 喪事(상사)때 마한을 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왕은 남의 재앙을 좋아한 것은 不仁(불인)이라 하고 도리어 사신을 보내 조문케 하였다.

          53년에는 東沃沮(동옥저)의 임금이 良馬(양마)20필을 바치면서 이 사람이 듣건데

      『南韓(남한)에 성인이 있다하기로 이렇게 올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삼국은 모두 전쟁을 숭상하였는데

          왕만은 홀로 仁義(인의)를 지키고 위력을 내세우지 않으니 원근 여러나라가 풍문을 듣고 불침되기를

          願(원)하는자가 매우 많았다.61년 甲子(갑자)서기4년 3월에 왕이 돌아 가시니 壽(수)는 73세였다. 太子(태자) 南解(남해)가

          왕이 되어이해에 왕을 國都(국도) 남쪽에 장사지냈는데 소리를 왕이 돌아가신지 7일만에 왕비 알영씨도 따라 돌아가셨다.

          왕이 불던 玉笛(옥적)이  아직도 鳥嶺(조령) 서쪽에서 소리가  퍼지고 있으며 왕이 쓰던 金尺(금척)이 아직도 乾川(건천)

          남쪽에서 빛을 들어내고 있으니  왕의 永遠(영원)한 존재가 여기에더욱 뚜렷한 것이다.

          남해왕 뒤에 박씨왕이 전해지기 八代에 사위인 昔氏(석씨)와 金氏(김씨)가 번갈아 王位(왕위)를 이었으며

          徐羅(서라)의 국호는 智澄王(지징왕)때에 신라로 고쳤는데 歷年(역년)이 992년 이었다.

          세종13년 서기1429년 비로소 故都(고도) 경주에 사당을 세우고

          경종3년 서기1723년에 殿號(전호)를 걸어 崇德(숭덕)이라하며

          나라에서 제사지냈다. 영조27년 서기1751년 神主(신주)에 王字(왕자) 쓰게하고 묘비를 세웠다. 

 ♣ 오릉()     

  • 신라의 시조왕릉<始祖王陵>으로 전하는 오릉<五陵>은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의 능묘로 사적 제172호(봉분 높이 10m, 지름 20m 내외)로 지정되었으며, 모두 5기의 능이 있는데, 박혁거세왕과 왕후인 알영왕비,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의 5위(位)의 능묘로 담암사 북쪽에 있다고 옛 문헌에 전하고 있으며,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외형은 경주 시내 평지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다른 많은 삼국 시대 신라 고분과 같이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 봉토분<封土墳>으로 4기<基>는 원형분<圓形墳>이나 1기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되어 있다. 제1릉<第1陵>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5기<基> 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第2陵>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다. 제3릉<第3陵>은 제2릉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7.2m로 표형쌍분<瓢形雙墳>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형분<圓形墳> 2기<二基>가 합쳐진 것이다. 제4릉<第4陵>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이다. 제5릉<第5陵>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이와 같이 5기<基> 중 1기<基>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2인용 무덤이기 때문에 오릉<五陵>의 실제 피장자는 6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이와 같은 대형<大形>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것으로 후세<後世> 수축<修築>이었으면 몰라도 혁거세왕<赫居世王> 당시의 고분 형식은 아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오릉<五陵>을 사릉<蛇陵>이라 했는데,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남해왕<南解王>· 유리왕<儒理王>·파사왕<破娑王> 등 박씨 사왕<朴氏 四王>을 사릉원내<蛇陵園內>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서는 혁거세왕<赫居世王>과 알영부인<閼英夫人>을 합장<合葬>하려 하자 뱀의 이변<異變>이 있어 각각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이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는데, 혁거세왕<赫居世王>이 재위 62년만에 승천하였다가 그후 7일만에 유체<遺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고 왕후<王后>도 따라 승하하니 사람들이 합장<合葬>하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냈으므로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하며 담암사<曇巖寺> 북릉<北陵>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담암사<曇巖寺> 위치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오릉<五陵>의 제실<齊室>인 숭덕전<崇德殿=혁거세왕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으로 본래 조선 세조 11년(1429)에 지음> 앞의 홍전문<紅箭門>이 사찰의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이용하여 서 있는데, 오릉<五陵> 옆에 사찰<寺刹>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담암사<曇巖寺>의 유물로 믿고 있다. 숭덕전<崇德殿>은 조선 세조<朝鮮 世祖> 11년(1429)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선조<宣祖> 33년(1600)에 재건하였고, 숙종<肅宗> 20년(1694)에 수리하였으며 경종 3년(1723)에 사액<賜額>되었다. 또한 경내에는 영조<英祖> 35년(1759)에 세워진 혁거세왕<赫居世王>과 숭덕전<崇德殿>의 내력을 새긴 신도비<新道碑>가 있다. 숭덕전 위편에는 알영왕비의 탄생지라 하는 알영정<閼英井> 터가 있다.
  • 가는 길: 자가운전시 톨게이트에서 5분정도 소요.
               시내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오른쪽에 돌담이 보이는 곳으로 우회전하면 바로 오릉 주차장이다.
               고속버스터미널 정문 맞은편 도로에서 500~507번 내남, 봉계 방면 버스를 타면 15분정도 소요.
               

               
               
    오릉의 전경

          ♣ 숭덕전(崇德殿)

  •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의 묘(廟)로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다. 1429년(세종11) 왕명에 의해 창건되어, 봄과 가을에 증사(中祀)의 예로 치제(致祭)할 것을 정식으로 정하였다. 1723년(경종3) 숭덕전의 현판을 하사하고 참봉 2인을 두어 관리하게하였다. 1752년(영조28) 묘정에 비석을 세워 신라 시조가 백성에게 끼친 유덕을 기록하였다.
  • 제관으로는 헌관(獻官), 축(祝), 장찬(掌饌), 집준(執尊), 집사(執事), 찬자(贊者), 알자(謁者) 등이다. 헌관은 관찰사가 왕을 대행하여 치제하였다.

  • 숭덕전


    숙경문(肅敬門=숭덕전으로 들어가는 내신문(內神門))


    숭성각(崇聖閣=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신도비각으로 1759년(영조35년) 어명으로 건립
    소재;경북 경주시 탑동

        ♣ 나정(蘿井)

  •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들어 있는 우물로 사적 제 245호이다. 경주시 탑동 오릉에서 남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소나무 숲속에 위치하고, 옆에는 조그만 시조유허비가 있다.
  • 옛날 진한 땅에 고조선의 유민이 세운 여섯 마을이 있었는데, 6촌 촌장들이 어느날 양산(지금의 경주 남산) 숲속에 있는 우물인 나정 곁을 바라보는데 이상한 빛이 드리워졌고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어 다가가보니, 우물가에 큰 알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사내 아이가 태어나와 마침내 자라 신라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서기 6년(남해왕 3년)에 이곳에 묘전을 세우고 왕이 즉위하면 반드시 제를 올렸다.

  • 나정(蘿井)

      ♣ 알영정(閼英井) 비각

  •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로, 오릉원 내에 있으며, 우물터에 비각이 서있다.
    알영정(閼英井) 비각


    알영지(
    閼英池)

       ♣ 성모사(聖母祠)

  •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는 나정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성령의 힘에 의해 잉태되어 성모(聖母)에게서 났다는 또 한가지 설이 있다. 성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로 선술(仙術)을 얻어 신선이 되어, 동해 바다 위에 나와 놀다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경주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 머물다가 시조왕을 낳았다고 한다.
  • 성모사는 성모를 기리기 위해 경주 사악 선도산 주봉의 높은 바위 밑에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에 26대 진흥왕 때 안흥사(安興寺)의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사당의 왼쪽 아래 땅 속에서 황금 160냥을 얻었다는 기록과, 경명왕 때는 왕이 이곳에 올라와서 매 사냥을 하다가 매를 잃고 신모에게 기도하여 되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숭덕전 고왕록(攷往錄)>에는 임진왜란 때 후손 언수(彦秀)가 숨어서 피란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오래된 역사와 전설을 가진 사당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것은 구한말 전 참봉(前 參奉) 기문(基汶)이 비각을 중건하고, 다시 1963년에 사우(祠宇)를 중건한 것이다.
    성모사(聖母祠)

    옆에서 본 성모사(聖母祠)와 그 뒤쪽에 있는 석불(石佛)

        ♣ 박혁거세 탄생신화

  • 기원전 69년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뽑기 위한 논의를 하던중 남쪽 방향의 양산 아래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백마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한다. 이들이 그곳에 가보니 박같은 알이 있어 이를 깨어 보니, 잘생긴 사내아기가 나왔다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연유로 그아이를 혁거세라 이름 지었고, 박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박씨라 하였다. 그가 곧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이다.
  • 같은 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서는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 갈비에서 어린 여자 아이가 나왔다 한다. 이 아이는 얼굴과 입술은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를 닮아 보기가 흉해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이라 이름지었다.
  • 기원전 57년 이 두 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 되었고, 알영을 왕비로 맞아들였으며,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대 왕은 박, 석(昔), 김의 3성이 돌아가며 하였는데, 그중 박씨 성을 가진 왕은 시조인 박혁거세를 포함하여 모두 10명이다.
  • 박씨는 녀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으며, 모든 박씨는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의 혼인을 피하는 이유도 이러한 까닭이다.
  • 박씨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대왕)과 일성왕(신라 7대왕)에서 갈라 졌으며, 일성왕계는 그의 26세손인 경명왕(신라 54대왕)과 경애왕(신라 55대왕)대에서 다시 갈라졌다.
  •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로 이어졌다.  

         ♣ 신라오릉보존회 중앙청년회 홈페이지 (http://soback.kornet.net/~parkshi/)

      (BC 69∼ AD 4 건국시조 재위 BC 57∼AD4) 신라 박씨(朴氏)의 시조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박혁거세라고 지칭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건국설화가 있다.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6촌(斯盧六村)의 촌장(村長)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서 임금을 모시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고, 흰말〔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가보니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하늘로 날아가고,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이다. 알의 크기가 박〔瓠〕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고, 그 광채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弗矩內)라고 하였다. 고허촌(高墟村) 촌장인 소벌공(蘇伐公, 혹은 蘇伐都利)이 데리고 가 길렀다. 그리고 6촌의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존경하였고, 나이 13세가 되어 이들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고, 나라이름을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서기전 53년에 알영(閼英)을 비(妃)로 맞아들였다. 이 건국설화는 성읍국가(城邑國家) 단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6촌장이란 이미 신라의 개국 이전에 분거(分居)하여 살았던 고조선의 유민들이었다. 따라서, 토착세력을 압도한 유이민(流移民) 박씨집단을 상정할 수 있으며, 말〔馬〕 및 천신하강(天神下降)의 모티프로 볼 때 이들은 말을 토템으로 하는 천신족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혁거세, 불구내 등이 광명을 의미한다는 데서도 그들의 태양숭배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이미 개국연대 이전부터 경주지역에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개국연대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前漢 孝宣帝 五鳳 元年 甲子, 서기전 57)라는 설은 문제가 있다. 첫째,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의 관점에서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나 백제보다 먼저 잡은 것이 그러하다. 둘째, 갑자년이라는 간지(干支)가 참위설(讖緯說)의 갑자혁명설(甲子革命說)에 입각한 듯하기 때문이다. 박혁거세는 서기전 37년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고, 서기전 32년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이 단계의 사로국은 대체로 경주평야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서기전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으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道德)의 나라’라 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서기전 20년 마한 왕이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는다고 노하였으며, 이해에 호공(瓠公)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다. 서기전 19년 마한왕이 죽자 사신을 보내어 조위(弔慰)하였다. 서기전 5년에는 동옥저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치기도 하였다. 죽은 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

      ▷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韓國史講座―古代篇―(李基白·李基東共著, 一潮閣, 1982)
         新羅史硏究(今西龍, 國書刊行會, 1933)
         新羅史の諸間題(末松保和, 東洋文庫, 1954)
         神話と文化史(三品彰英論文集, 平凡社, 1971)
       
      1. 始祖大王

      • 朴氏之先 出於新羅始祖赫居世而先是朝鮮遊民 分居東海濱山谷間 爲六村
        박씨의 선조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에서 시작되었는데 신라가 이룩되기 전에 고조선의 유민들이 동해 해변이나 산골에 흩어져 살아서 육촌을 이루었고 육촌에는 각각 촌장이 있었다
      • 一曰閼川楊山村(今蕓岩寺) 其長 謁平,
        二曰 突山高墟村 (今南山部) 其長 蘇伐都利,
        三曰茂山大樹村(今長福)其長 俱禮,
        四曰山珍支村 其長 智伯瓠,
        五曰金山加利村(今加德) 其長 祗,
        六曰明活山高耶村(今臨川) 其長 虎珍,
        是爲辰韓六部長(或云六祖自天而降)
        첫째촌은 알천가의 양산촌인데 촌장은 (李)알평이고
        둘째촌은 돌산기슭의 고허촌인데 촌장은 (崔)소벌도리이며
        셋째촌은 무산기슭의 대수촌인데 촌장은 (孫)구례요
        넷째촌은 자산기슭의 진지촌인데 촌장은 (鄭)지백호이고
        다섯째촌은 금산기슭의 가리촌인데 촌장은 (裵)지타요
        여섯째 촌은 명활산 기슭의 고야촌인데 촌장은 (薛)호진이니
        이를 진한 육부장 또는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조상이라고도 한다.
      • 其時 悶無君長 六村長 俱會閼川 三日齊沐 禱于天 檀紀二二六五年 壬子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蘿井(現南七里)傍林間五色雲中 有馬大斯而如仙人拜之狀 卽往觀之 馬忽不見(或云龍馬爲始祖王所乘) 只有一胞 如卵如瓠
        그때 육촌을 통솔할 임금이 없음을 걱정한 끝에 육촌장이 閼川에 모여서 사흘동안 목욕재개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더니 단군기원 2265년(서기전69,한무제 지절 원년 임자)에 고허촌장 蘇伐都利가 멀리 양산을 바라보니 그 밑의 蘿井근처 숲사이에 오색이 영롱한 서기가 뻗치고 용마가 큰 소리를 지르며 신선이 꿇어 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이는지라 즉시 쫓아가 보니 용마는 보이지 않고 한 胞가 있는데 큰 알 같기도 하고 박 같기도 하였다.
      • 解胞卽始祖誕生 儀形 端美 奉浴于東川 新生光彩 鳥獸率舞 六村人 以其神異 養之 辰人之語 謂瓠爲朴故 以朴爲姓 取赫赫然居當世之義 以赫居世三字 爲韓
        소벌공이 신기하게 여겨 포를 깨어 본즉 사내아기(곧 시조왕)가 태어나니 풍채가 단정하고 아름다운지라 동천에 목욕시켜드리니 온 몸에 광채가 나고 가까이 있던 새와 짐승들이 신인의 탄생을 축복하여 노래하고 춤을 추기로 육촌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받들어 길렀다.진한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瓠(박)에 朴(박)이라 부르는 고로 박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박으로 성을 삼고 혁혁한 광명을 이 세상에 주시며 오래오래 살아 주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赫居世라 이름 지었다 한다.
      • 年十三 岐夙成 六部人 推尊之 立爲君 檀紀二二七七年 甲子也 居西干(辰人稱王之語或云呼貴人之稱) 國號 徐羅 其後 改國號曰新羅(神字 德業一新 羅字 網羅四方之義)
        열세살에 키가 어른과 같이 숙성하시므로 육촌 사람들이 받들어서 임금으로 모시었으니 이때가 바로 단기2277년(서기 전57년,한선제 오봉원년) 甲子 사월 丙辰일이었다. 왕호를 居西干(그때의 말로 존귀함을 뜻함)이라 하고 나라이름을 徐羅라고 하였다가 그후에 新羅라고 고쳤다(新은 德業日新이요 羅는 網羅四方이라는 뜻임).
      • 按始祖王 乃聖母所誕也 故 中國人讚 有仙桃聖母娠賢O邦之語 慶州西岳仙桃山 舊有聖母祠而至今重修守護.
        朱子曰無人道而生 或者以爲不祥 先儒 피疑之而 張子云天地之始 固未始先有人也卽人固有化而生者矣 盖天地之氣生之也
        상고해 본즉 시조왕은 곧 성모가 낳으신 분이라 그런고로 중국문헌에 선도산의 성모가 현인을 낳아 나라를 창립했다는 말이 있고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에 의하여 태어나지 않음을 혹자는 상서롭지 않다하여 선유들이 많이 의심했지만 장자가 이르되 천지가 "개벽한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다가 후에 사람이 생겼으니 이는 곧 천지의 기운으로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했고
      • 蘇氏曰 凡物之異於常物者 其取天地之氣常多故 其生也或異 麒麟之生 異於犬羊 蛟龍之生 異於魚龜 物固有然者矣 況神人之生 異於凡人 何足재哉 斯言 德之矣
        소씨는 말하되 "대체로 보통과 다른 물건은 천지기운으로 되는 일이 많음에 까닭이 있고 그 까닭이 다르기에 기린의 출생이 개나 양과는 다르고 교룡의 출생이 어별과는 다른 법인즉 하물며 신인의 탄생이 범인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괴이할 바가 아니라" 했으니 이 말이 둘다 이치에 맞는 것이다.
      • 楊山蘿井 有始祖王誕降碑閣而重修守護
        양산 나정에 이 사실을 기록한 <시조왕 탄강 비각이 있어 이를 중수하여 지금까지 수호하고 있다.
      • 牧隱李穡詩 云鷄林天瓠爲朴蔓延扶疎何赫赫
        明太朝高皇帝命題新羅詩 云伊昔赫居世開國五鳳年相傅千載久粗保一隅偏
        목은 이색의 시에 "계림의 하늘아래 표주박에서 태어난 박씨들이 뻗어나고 퍼져서 어찌나 혁혁한 지고" 라 하였고 명나라 태조고황제가 "신라"라는 명제를 내려 시를 짓되 "옛날에 혁거세가 한나라 오봉원년에 나라를 창건하여 천년을 내려오며 동쪽 한 지방을 지켜오고 있다"라고 하였다.


      2.始祖王妃

      • 權近始祖王妃之生也 亦有瑞應 初 龍見於閼英亭 右협生女兒 有老 異而育之 名以井名 及長 有令德 爲王妃 能內輔 治國基 國人 謂之二聖
        시조왕비의 탄생도 역시 보통과는 달라 용이 알영정 우물가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니 동네의 안노인이 신기하게 여겨 양육하고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지었더니 자라서 훌륭한 덕을 갖추시고 왕비가 되시어 시조왕을 잘 보필하시며 나라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시니 백성들이 이성이라 불렀다.
      • 權近曰國家之興 莫不有內助之美 夏有塗山 商有有 周有太 所以正始而基化者 其至矣 閼英 爲始祖之妃 國人 稱美之 必有德 有以服人之心矣.
        권 근이 말하되 국가가 흥할 때는 반드시 내조의 미가 있기 마련이어서 하나라에는 도산이 있었고 상나라에는 유신이 있었고 주나라에는 태사가 있어서 나라의 시초를 바로잡고 교화의 기초를 튼튼히 한 연유가 되었다. 알영씨가 시조왕비의 자리에 앉게 되심을 신라사람들이 찬미함은 그 높으신 덕이 국민들을 설복시킨 까닭이라 하겠다.
      • 謹按 天降神聖 必配聖妃 理固然也 閼英氏 生於龍歸於王 亦天意之不尋常也 周文王 得太 時人 有好述之詠 始祖王 得閼英 國人 有二聖之稱 夫所謂萬化之基 百福之源 果不在玆歟
        삼가 생각건데 하늘이 신성을 내리실 때 반드시 성비를 배필로 내리심은 이치에 당연한 일인지라 閼英씨가 용에서 탄생하여 始祖王과 짝짓게 된 일도 하느님의 뜻이 심상치 않음이니 주나라 문왕이 태사를 얻어서 그때 사람들이 시전의 관저장과 같은 노래를 불러 찬양했고 始祖王께서 閼英씨를 얻음으로 국인이 二聖이라고 칭송하였으니 萬物和育의 기본과 만복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 是故 詩有葛斯 本支百世之美而我始祖後裔 亦莫不繁衍綿連者 此내聖妃之正化於始 貽福於後而固以必休於周矣
        그런고로 시전에 칡덩굴처럼 뻗어나고 메뚜기처럼 퍼저나서 본손과 지손이 백대의 아름다움을 이루었다고 하는 말과 같이 우리 시조왕의 자손이 길이길이 번창해가는 것도 역시 시조왕비 할머니의 성덕으로 기초를 바로잡아 복을 후세에 내리심이 주나라의 태사에 필적하다 하겠다

   ♣ 박혁거세 오릉 춘분대제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위업을 기리는 숭덕전 춘분대제가 20일 경주시 탑동 오릉에서 봉행 됐습니다.
                             2001년 3월 20일(춘분) 향사에는 신라 박씨 자손 천여 명이 참가해 ,신라 천년의 영광을 전승해 나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경주 지역에선 매년 춘분, 박씨 외에도 미추왕을 모신 황남동 숭혜전에서 경주 김씨 자손들의 향사가 봉행 되고,                                                            석탈해왕을 모신 동천동 숭신전에서도 경주 석씨들의 대제가 거행된다.

                                                              박혁거세왕에 관하여... 

    ♣ 시조왕사적 (역문)

          王의 姓은 朴이요 諱(휘)는 혁거세이다. 聖母(성모)의 휘는 婆蘇(파소)인데 본래 漢(한) 宣帝(선제)의 公主(공주)로

           仙術(선술)을 배워東(동)으로 海上(해상)에서 노닐다가 경주 선도산에 이르렀다. 地節(지절)元年(원년)(왕자 )

           서기 기원전 619년에 큰알를  낳아 楊山(양산)기슭蘿井(나정)숲에 두었다.  

           이때 高虛村長(고허촌장)이 멀리 서광이 뻗친 것을보니 마치仙人(선인)이 엎드려 절하고있는 모습갔았다.

           아윽고 알을 깨고 男兒(남아)를 얻으니 형체가 단정하였다.  東川(동천)에서 목욕시키매 몸에서 광채가 나고새나 짐승들이

           모여들어 춤을 추었다. 六村(육촌)사람들은 그 출생이 하도 기이하여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나이 열셋에 의젓함이 어른같아

           육촌장들에게 추대되어 임금이 되었다. 王號(왕호)를 居西干(거서간)이라고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는데

           때는 五鳳(오봉)元年甲子(원년갑자)서기전 517년 4월이었다. 5년봄 正月(정월)閼英(알영)씨를 왕비를 맞았는데

           왕비의 출생도 역시 祥瑞(상서)로웠다.

          즉 龍(용)이 閼英井(알영정)에 나타나오른쪽 겨드랑이에서 女兒(여아)를 낳으므로 한 할미가 이상히 여겨 거두어 기르고  

          샘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불렀다. 자라서 왕비가 되어서는 어진德(덕)으로  왕을 잘 보필하니 國人(국인)이 二聖(이성)이라고

          칭송하였다. 왕8년에 왜병이 국경을 침범하려다가  왕의 神德(신덕)을 듣고 곧 물러갔으며

          17년에는 왕과 왕비가 六部(육부)를 돌아보고 農桑(농상)을 권장하였다.

          19년에는 弁韓(변한)이 항복해오고 21년에는 王京(왕경)의 城(성)을 쌓고 金城이라 불렀으며

          26년에는 비로소 王官(왕관)을 지었다.

          30년에는 樂浪人(낙랑인)이 노략질을 하려고 왔다가 國境(국경)에 들어서서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들에는 露積(노적)가리가많은 것을보고 서로 말하기를 『道(도)가 있는나라이니 범할 수 없다』 徹兵(철병)해 돌아 갔다.

          38년에는 瓠公(호공)을 馬韓(마한)에보내어 수교하게 되었는데 그 왕이 事大(사대)의 예를 責望(책망)함으로 호공이

          응수하기를『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나라를 일으켜 인사에 질서있으므로 天時(천시)가 和(화)하고 창고가 가득하여

          백성들은 겸양합니다. 그리하여 辰韓(진한),弁韓(변한),樂浪(낙랑),倭人(왜인)들은 모두 畏服(외복)아니함이 없지만

          우리 왕께서는 겸허하여 小臣(소신)으로 하여금 수교를 하게하니 예에 지나치다고 할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馬韓(마한)왕이  노하여 죽이려고 하다가 左右(좌우)의 만류로 그만 두었다. 해를 넘겨 이듬해에 마한왕이 돌아 가므로

          어떤이가 왕께 권유하기를 전에 마한왕이 우리 사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지금 喪事(상사)때 마한을 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왕은 남의 재앙을 좋아한 것은 不仁(불인)이라 하고 도리어 사신을 보내 조문케 하였다.

          53년에는 東沃沮(동옥저)의 임금이 良馬(양마)20필을 바치면서 이 사람이 듣건데

      『南韓(남한)에 성인이 있다하기로 이렇게 올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삼국은 모두 전쟁을 숭상하였는데

          왕만은 홀로 仁義(인의)를 지키고 위력을 내세우지 않으니 원근 여러나라가 풍문을 듣고 불침되기를

          願(원)하는자가 매우 많았다.61년 甲子(갑자)서기4년 3월에 왕이 돌아 가시니 壽(수)는 73세였다. 太子(태자) 南解(남해)가

          왕이 되어이해에 왕을 國都(국도) 남쪽에 장사지냈는데 소리를 왕이 돌아가신지 7일만에 왕비 알영씨도 따라 돌아가셨다.

          왕이 불던 玉笛(옥적)이  아직도 鳥嶺(조령) 서쪽에서 소리가  퍼지고 있으며 왕이 쓰던 金尺(금척)이 아직도 乾川(건천)

          남쪽에서 빛을 들어내고 있으니  왕의 永遠(영원)한 존재가 여기에더욱 뚜렷한 것이다.

          남해왕 뒤에 박씨왕이 전해지기 八代에 사위인 昔氏(석씨)와 金氏(김씨)가 번갈아 王位(왕위)를 이었으며

          徐羅(서라)의 국호는 智澄王(지징왕)때에 신라로 고쳤는데 歷年(역년)이 992년 이었다.

          세종13년 서기1429년 비로소 故都(고도) 경주에 사당을 세우고

          경종3년 서기1723년에 殿號(전호)를 걸어 崇德(숭덕)이라하며

          나라에서 제사지냈다. 영조27년 서기1751년 神主(신주)에 王字(왕자) 쓰게하고 묘비를 세웠다. 

 ♣ 오릉()     

  • 신라의 시조왕릉<始祖王陵>으로 전하는 오릉<五陵>은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의 능묘로 사적 제172호(봉분 높이 10m, 지름 20m 내외)로 지정되었으며, 모두 5기의 능이 있는데, 박혁거세왕과 왕후인 알영왕비,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의 5위(位)의 능묘로 담암사 북쪽에 있다고 옛 문헌에 전하고 있으며,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외형은 경주 시내 평지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다른 많은 삼국 시대 신라 고분과 같이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 봉토분<封土墳>으로 4기<基>는 원형분<圓形墳>이나 1기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되어 있다. 제1릉<第1陵>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5기<基> 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第2陵>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다. 제3릉<第3陵>은 제2릉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7.2m로 표형쌍분<瓢形雙墳>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형분<圓形墳> 2기<二基>가 합쳐진 것이다. 제4릉<第4陵>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이다. 제5릉<第5陵>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이와 같이 5기<基> 중 1기<基>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2인용 무덤이기 때문에 오릉<五陵>의 실제 피장자는 6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이와 같은 대형<大形>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것으로 후세<後世> 수축<修築>이었으면 몰라도 혁거세왕<赫居世王> 당시의 고분 형식은 아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오릉<五陵>을 사릉<蛇陵>이라 했는데,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남해왕<南解王>· 유리왕<儒理王>·파사왕<破娑王> 등 박씨 사왕<朴氏 四王>을 사릉원내<蛇陵園內>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서는 혁거세왕<赫居世王>과 알영부인<閼英夫人>을 합장<合葬>하려 하자 뱀의 이변<異變>이 있어 각각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이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는데, 혁거세왕<赫居世王>이 재위 62년만에 승천하였다가 그후 7일만에 유체<遺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고 왕후<王后>도 따라 승하하니 사람들이 합장<合葬>하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냈으므로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하며 담암사<曇巖寺> 북릉<北陵>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담암사<曇巖寺> 위치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오릉<五陵>의 제실<齊室>인 숭덕전<崇德殿=혁거세왕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으로 본래 조선 세조 11년(1429)에 지음> 앞의 홍전문<紅箭門>이 사찰의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이용하여 서 있는데, 오릉<五陵> 옆에 사찰<寺刹>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담암사<曇巖寺>의 유물로 믿고 있다. 숭덕전<崇德殿>은 조선 세조<朝鮮 世祖> 11년(1429)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선조<宣祖> 33년(1600)에 재건하였고, 숙종<肅宗> 20년(1694)에 수리하였으며 경종 3년(1723)에 사액<賜額>되었다. 또한 경내에는 영조<英祖> 35년(1759)에 세워진 혁거세왕<赫居世王>과 숭덕전<崇德殿>의 내력을 새긴 신도비<新道碑>가 있다. 숭덕전 위편에는 알영왕비의 탄생지라 하는 알영정<閼英井> 터가 있다.
  • 가는 길: 자가운전시 톨게이트에서 5분정도 소요.
               시내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오른쪽에 돌담이 보이는 곳으로 우회전하면 바로 오릉 주차장이다.
               고속버스터미널 정문 맞은편 도로에서 500~507번 내남, 봉계 방면 버스를 타면 15분정도 소요.
               

               
               
    오릉의 전경

          ♣ 숭덕전(崇德殿)

  •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의 묘(廟)로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다. 1429년(세종11) 왕명에 의해 창건되어, 봄과 가을에 증사(中祀)의 예로 치제(致祭)할 것을 정식으로 정하였다. 1723년(경종3) 숭덕전의 현판을 하사하고 참봉 2인을 두어 관리하게하였다. 1752년(영조28) 묘정에 비석을 세워 신라 시조가 백성에게 끼친 유덕을 기록하였다.
  • 제관으로는 헌관(獻官), 축(祝), 장찬(掌饌), 집준(執尊), 집사(執事), 찬자(贊者), 알자(謁者) 등이다. 헌관은 관찰사가 왕을 대행하여 치제하였다.

  • 숭덕전


    숙경문(肅敬門=숭덕전으로 들어가는 내신문(內神門))


    숭성각(崇聖閣=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신도비각으로 1759년(영조35년) 어명으로 건립
    소재;경북 경주시 탑동

        ♣ 나정(蘿井)

  •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들어 있는 우물로 사적 제 245호이다. 경주시 탑동 오릉에서 남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소나무 숲속에 위치하고, 옆에는 조그만 시조유허비가 있다.
  • 옛날 진한 땅에 고조선의 유민이 세운 여섯 마을이 있었는데, 6촌 촌장들이 어느날 양산(지금의 경주 남산) 숲속에 있는 우물인 나정 곁을 바라보는데 이상한 빛이 드리워졌고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어 다가가보니, 우물가에 큰 알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사내 아이가 태어나와 마침내 자라 신라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서기 6년(남해왕 3년)에 이곳에 묘전을 세우고 왕이 즉위하면 반드시 제를 올렸다.
    나정(蘿井)

      ♣ 알영정(閼英井) 비각

  •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로, 오릉원 내에 있으며, 우물터에 비각이 서있다.
    알영정(閼英井) 비각


    알영지(
    閼英池)

       ♣ 성모사(聖母祠)

  •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는 나정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성령의 힘에 의해 잉태되어 성모(聖母)에게서 났다는 또 한가지 설이 있다. 성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로 선술(仙術)을 얻어 신선이 되어, 동해 바다 위에 나와 놀다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경주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 머물다가 시조왕을 낳았다고 한다.
  • 성모사는 성모를 기리기 위해 경주 사악 선도산 주봉의 높은 바위 밑에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에 26대 진흥왕 때 안흥사(安興寺)의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사당의 왼쪽 아래 땅 속에서 황금 160냥을 얻었다는 기록과, 경명왕 때는 왕이 이곳에 올라와서 매 사냥을 하다가 매를 잃고 신모에게 기도하여 되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숭덕전 고왕록(攷往錄)>에는 임진왜란 때 후손 언수(彦秀)가 숨어서 피란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오래된 역사와 전설을 가진 사당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것은 구한말 전 참봉(前 參奉) 기문(基汶)이 비각을 중건하고, 다시 1963년에 사우(祠宇)를 중건한 것이다.
    성모사(聖母祠)

    옆에서 본 성모사(聖母祠)와 그 뒤쪽에 있는 석불(石佛)

        ♣ 박혁거세 탄생신화

  • 기원전 69년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뽑기 위한 논의를 하던중 남쪽 방향의 양산 아래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백마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한다. 이들이 그곳에 가보니 박같은 알이 있어 이를 깨어 보니, 잘생긴 사내아기가 나왔다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연유로 그아이를 혁거세라 이름 지었고, 박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박씨라 하였다. 그가 곧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이다.
  • 같은 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서는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 갈비에서 어린 여자 아이가 나왔다 한다. 이 아이는 얼굴과 입술은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를 닮아 보기가 흉해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이라 이름지었다.
  • 기원전 57년 이 두 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 되었고, 알영을 왕비로 맞아들였으며,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대 왕은 박, 석(昔), 김의 3성이 돌아가며 하였는데, 그중 박씨 성을 가진 왕은 시조인 박혁거세를 포함하여 모두 10명이다.
  • 박씨는 녀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으며, 모든 박씨는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의 혼인을 피하는 이유도 이러한 까닭이다.
  • 박씨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대왕)과 일성왕(신라 7대왕)에서 갈라 졌으며, 일성왕계는 그의 26세손인 경명왕(신라 54대왕)과 경애왕(신라 55대왕)대에서 다시 갈라졌다.
  •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로 이어졌다.  

         ♣ 신라오릉보존회 중앙청년회 홈페이지 (http://soback.kornet.net/~parkshi/)

      (BC 69∼ AD 4 건국시조 재위 BC 57∼AD4) 신라 박씨(朴氏)의 시조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박혁거세라고 지칭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건국설화가 있다.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6촌(斯盧六村)의 촌장(村長)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서 임금을 모시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고, 흰말〔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가보니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하늘로 날아가고,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이다. 알의 크기가 박〔瓠〕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고, 그 광채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弗矩內)라고 하였다. 고허촌(高墟村) 촌장인 소벌공(蘇伐公, 혹은 蘇伐都利)이 데리고 가 길렀다. 그리고 6촌의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존경하였고, 나이 13세가 되어 이들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고, 나라이름을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서기전 53년에 알영(閼英)을 비(妃)로 맞아들였다. 이 건국설화는 성읍국가(城邑國家) 단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6촌장이란 이미 신라의 개국 이전에 분거(分居)하여 살았던 고조선의 유민들이었다. 따라서, 토착세력을 압도한 유이민(流移民) 박씨집단을 상정할 수 있으며, 말〔馬〕 및 천신하강(天神下降)의 모티프로 볼 때 이들은 말을 토템으로 하는 천신족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혁거세, 불구내 등이 광명을 의미한다는 데서도 그들의 태양숭배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이미 개국연대 이전부터 경주지역에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개국연대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前漢 孝宣帝 五鳳 元年 甲子, 서기전 57)라는 설은 문제가 있다. 첫째,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의 관점에서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나 백제보다 먼저 잡은 것이 그러하다. 둘째, 갑자년이라는 간지(干支)가 참위설(讖緯說)의 갑자혁명설(甲子革命說)에 입각한 듯하기 때문이다. 박혁거세는 서기전 37년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고, 서기전 32년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이 단계의 사로국은 대체로 경주평야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서기전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으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道德)의 나라’라 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서기전 20년 마한 왕이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는다고 노하였으며, 이해에 호공(瓠公)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다. 서기전 19년 마한왕이 죽자 사신을 보내어 조위(弔慰)하였다. 서기전 5년에는 동옥저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치기도 하였다. 죽은 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

      ▷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韓國史講座―古代篇―(李基白·李基東共著, 一潮閣, 1982)
         新羅史硏究(今西龍, 國書刊行會, 1933)
         新羅史の諸間題(末松保和, 東洋文庫, 1954)
         神話と文化史(三品彰英論文集, 平凡社, 1971)
       
      1. 始祖大王

      • 朴氏之先 出於新羅始祖赫居世而先是朝鮮遊民 分居東海濱山谷間 爲六村
        박씨의 선조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에서 시작되었는데 신라가 이룩되기 전에 고조선의 유민들이 동해 해변이나 산골에 흩어져 살아서 육촌을 이루었고 육촌에는 각각 촌장이 있었다
      • 一曰閼川楊山村(今蕓岩寺) 其長 謁平,
        二曰 突山高墟村 (今南山部) 其長 蘇伐都利,
        三曰茂山大樹村(今長福)其長 俱禮,
        四曰山珍支村 其長 智伯瓠,
        五曰金山加利村(今加德) 其長 祗,
        六曰明活山高耶村(今臨川) 其長 虎珍,
        是爲辰韓六部長(或云六祖自天而降)
        첫째촌은 알천가의 양산촌인데 촌장은 (李)알평이고
        둘째촌은 돌산기슭의 고허촌인데 촌장은 (崔)소벌도리이며
        셋째촌은 무산기슭의 대수촌인데 촌장은 (孫)구례요
        넷째촌은 자산기슭의 진지촌인데 촌장은 (鄭)지백호이고
        다섯째촌은 금산기슭의 가리촌인데 촌장은 (裵)지타요
        여섯째 촌은 명활산 기슭의 고야촌인데 촌장은 (薛)호진이니
        이를 진한 육부장 또는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조상이라고도 한다.
      • 其時 悶無君長 六村長 俱會閼川 三日齊沐 禱于天 檀紀二二六五年 壬子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蘿井(現南七里)傍林間五色雲中 有馬大斯而如仙人拜之狀 卽往觀之 馬忽不見(或云龍馬爲始祖王所乘) 只有一胞 如卵如瓠
        그때 육촌을 통솔할 임금이 없음을 걱정한 끝에 육촌장이 閼川에 모여서 사흘동안 목욕재개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더니 단군기원 2265년(서기전69,한무제 지절 원년 임자)에 고허촌장 蘇伐都利가 멀리 양산을 바라보니 그 밑의 蘿井근처 숲사이에 오색이 영롱한 서기가 뻗치고 용마가 큰 소리를 지르며 신선이 꿇어 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이는지라 즉시 쫓아가 보니 용마는 보이지 않고 한 胞가 있는데 큰 알 같기도 하고 박 같기도 하였다.
      • 解胞卽始祖誕生 儀形 端美 奉浴于東川 新生光彩 鳥獸率舞 六村人 以其神異 養之 辰人之語 謂瓠爲朴故 以朴爲姓 取赫赫然居當世之義 以赫居世三字 爲韓
        소벌공이 신기하게 여겨 포를 깨어 본즉 사내아기(곧 시조왕)가 태어나니 풍채가 단정하고 아름다운지라 동천에 목욕시켜드리니 온 몸에 광채가 나고 가까이 있던 새와 짐승들이 신인의 탄생을 축복하여 노래하고 춤을 추기로 육촌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받들어 길렀다.진한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瓠(박)에 朴(박)이라 부르는 고로 박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박으로 성을 삼고 혁혁한 광명을 이 세상에 주시며 오래오래 살아 주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赫居世라 이름 지었다 한다.
      • 年十三 岐夙成 六部人 推尊之 立爲君 檀紀二二七七年 甲子也 居西干(辰人稱王之語或云呼貴人之稱) 國號 徐羅 其後 改國號曰新羅(神字 德業一新 羅字 網羅四方之義)
        열세살에 키가 어른과 같이 숙성하시므로 육촌 사람들이 받들어서 임금으로 모시었으니 이때가 바로 단기2277년(서기 전57년,한선제 오봉원년) 甲子 사월 丙辰일이었다. 왕호를 居西干(그때의 말로 존귀함을 뜻함)이라 하고 나라이름을 徐羅라고 하였다가 그후에 新羅라고 고쳤다(新은 德業日新이요 羅는 網羅四方이라는 뜻임).
      • 按始祖王 乃聖母所誕也 故 中國人讚 有仙桃聖母娠賢O邦之語 慶州西岳仙桃山 舊有聖母祠而至今重修守護.
        朱子曰無人道而生 或者以爲不祥 先儒 피疑之而 張子云天地之始 固未始先有人也卽人固有化而生者矣 盖天地之氣生之也
        상고해 본즉 시조왕은 곧 성모가 낳으신 분이라 그런고로 중국문헌에 선도산의 성모가 현인을 낳아 나라를 창립했다는 말이 있고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에 의하여 태어나지 않음을 혹자는 상서롭지 않다하여 선유들이 많이 의심했지만 장자가 이르되 천지가 "개벽한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다가 후에 사람이 생겼으니 이는 곧 천지의 기운으로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했고
      • 蘇氏曰 凡物之異於常物者 其取天地之氣常多故 其生也或異 麒麟之生 異於犬羊 蛟龍之生 異於魚龜 物固有然者矣 況神人之生 異於凡人 何足재哉 斯言 德之矣
        소씨는 말하되 "대체로 보통과 다른 물건은 천지기운으로 되는 일이 많음에 까닭이 있고 그 까닭이 다르기에 기린의 출생이 개나 양과는 다르고 교룡의 출생이 어별과는 다른 법인즉 하물며 신인의 탄생이 범인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괴이할 바가 아니라" 했으니 이 말이 둘다 이치에 맞는 것이다.
      • 楊山蘿井 有始祖王誕降碑閣而重修守護
        양산 나정에 이 사실을 기록한 <시조왕 탄강 비각이 있어 이를 중수하여 지금까지 수호하고 있다.
      • 牧隱李穡詩 云鷄林天瓠爲朴蔓延扶疎何赫赫
        明太朝高皇帝命題新羅詩 云伊昔赫居世開國五鳳年相傅千載久粗保一隅偏
        목은 이색의 시에 "계림의 하늘아래 표주박에서 태어난 박씨들이 뻗어나고 퍼져서 어찌나 혁혁한 지고" 라 하였고 명나라 태조고황제가 "신라"라는 명제를 내려 시를 짓되 "옛날에 혁거세가 한나라 오봉원년에 나라를 창건하여 천년을 내려오며 동쪽 한 지방을 지켜오고 있다"라고 하였다.


      2.始祖王妃

      • 權近始祖王妃之生也 亦有瑞應 初 龍見於閼英亭 右협生女兒 有老 異而育之 名以井名 及長 有令德 爲王妃 能內輔 治國基 國人 謂之二聖
        시조왕비의 탄생도 역시 보통과는 달라 용이 알영정 우물가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니 동네의 안노인이 신기하게 여겨 양육하고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지었더니 자라서 훌륭한 덕을 갖추시고 왕비가 되시어 시조왕을 잘 보필하시며 나라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시니 백성들이 이성이라 불렀다.
      • 權近曰國家之興 莫不有內助之美 夏有塗山 商有有 周有太 所以正始而基化者 其至矣 閼英 爲始祖之妃 國人 稱美之 必有德 有以服人之心矣.
        권 근이 말하되 국가가 흥할 때는 반드시 내조의 미가 있기 마련이어서 하나라에는 도산이 있었고 상나라에는 유신이 있었고 주나라에는 태사가 있어서 나라의 시초를 바로잡고 교화의 기초를 튼튼히 한 연유가 되었다. 알영씨가 시조왕비의 자리에 앉게 되심을 신라사람들이 찬미함은 그 높으신 덕이 국민들을 설복시킨 까닭이라 하겠다.
      • 謹按 天降神聖 必配聖妃 理固然也 閼英氏 生於龍歸於王 亦天意之不尋常也 周文王 得太 時人 有好述之詠 始祖王 得閼英 國人 有二聖之稱 夫所謂萬化之基 百福之源 果不在玆歟
        삼가 생각건데 하늘이 신성을 내리실 때 반드시 성비를 배필로 내리심은 이치에 당연한 일인지라 閼英씨가 용에서 탄생하여 始祖王과 짝짓게 된 일도 하느님의 뜻이 심상치 않음이니 주나라 문왕이 태사를 얻어서 그때 사람들이 시전의 관저장과 같은 노래를 불러 찬양했고 始祖王께서 閼英씨를 얻음으로 국인이 二聖이라고 칭송하였으니 萬物和育의 기본과 만복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 是故 詩有葛斯 本支百世之美而我始祖後裔 亦莫不繁衍綿連者 此내聖妃之正化於始 貽福於後而固以必休於周矣
        그런고로 시전에 칡덩굴처럼 뻗어나고 메뚜기처럼 퍼저나서 본손과 지손이 백대의 아름다움을 이루었다고 하는 말과 같이 우리 시조왕의 자손이 길이길이 번창해가는 것도 역시 시조왕비 할머니의 성덕으로 기초를 바로잡아 복을 후세에 내리심이 주나라의 태사에 필적하다 하겠다

   ♣ 박혁거세 오릉 춘분대제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위업을 기리는 숭덕전 춘분대제가 20일 경주시 탑동 오릉에서 봉행 됐습니다.
                             2001년 3월 20일(춘분) 향사에는 신라 박씨 자손 천여 명이 참가해 ,신라 천년의 영광을 전승해 나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경주 지역에선 매년 춘분, 박씨 외에도 미추왕을 모신 황남동 숭혜전에서 경주 김씨 자손들의 향사가 봉행 되고,                                                            석탈해왕을 모신 동천동 숭신전에서도 경주 석씨들의 대제가 거행된다.

 


              진원박씨족보 2005.2.10 수정   박민홍 011-393-1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