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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원박씨(珍原朴氏)

 

  •   오늘날 전하는 진원박씨의 족보중 가장 오래된 것은 竹川先生(죽전선생)의 孫子(손자)인 東溪公春長(동계공춘장)<진사>이 1657년에 처음에 간행한 丁酉譜(정유보)이다. 거기에 시조는 諱(휘) 進文(진문)으로 기록 하면서 『 신라종성  仕高麗(사고려) 位至大將軍(위지대장군) 己上文籍不存 (기상문적부존) 不可攷(불가고)』라고  事行(사행)을 정리하였다. 그렇다면 『 시조 진문공은  신라박혁거세의 왕손으로 高麗朝(고려조)에서 벼슬하여 地位(지위)가 大將軍(대장군)에 이르렀고 그 이상은 文籍(문적)이 없어 可考(가고)할 수 없다 』는 말이다. 이어 東溪公(동계공)은 또 그 譜序(보서)에서 『  진원에 有亨(유형)보내어 舊譜(구보)를 가져다가 자손의 支派(지파)를 찾고 長興(장흥)에 片紙 (편지) 하여그 支派(지파)를 조사하고서 이렇게 刊行(간행)한다. 』고 하였으니 이미 그 훨씬 전에 족보가 있었음이 분명하며 동시에 시조 진문 장군에 관한 것도  오랜 文籍(문적)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始祖公(시조공) 在世(재세)의 時期(시기)는 葦南公(위남공)에서 逆算(역산)하여 대량12세기 고려 명종년간  전후로 짐작된다 . 한편 시조 진문공 이하 위남선조 이상의 上系先祖(상계선조)들의 住居地(주거지)는 확실치 못하여 언제부터 우리 박씨가 진원에 定着(정착)하였는지 단언키 어려운 면이 있다. 或人(혹인)은 위남선조때부터 진원에 정착하였다고 보는 이도  있지만 이는 상계보를 깊이 살피지 않는데 연유한 탓일 것이다. 始祖 進文公(시조 진문공)과   2세 孝大公(효대공)은 각기 대장군과 大相(대상)이었다는  官爵(관작)만 기록되어 있을 뿐 配位(배위)조차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3세인 檢校將軍(검교장군) 諱 贇(휘 빈)이 金吾衛將軍(금오위장군)을 지낸  진원오씨 시조 吳存石(오존석)의 사위가 되었고 4세인 判軍器監(판군기감) 成亮公(성량공)이 전주전씨의 시조인 全元呂(전원려)의 사위가 되었으며 5세인 文下侍중(문하시중)과 大提學(대제학)을 지낸 諱 瞻(휘 첨)이 진원오씨 諱 益(휘 익)의 사위가 된데다 또 6세인 全羅道兵馬水軍 節度使(전라도병마수군 절도사)洪瑞公(홍서공)전주 최씨 諱 松(휘 송)의 사위이며 7세 求禮監務(구례감무)諱 溫(휘 온)은 진원전씨<현.담양전씨> 大司憲(대사헌) 휘 의의사위가 되었다. 이상 上系(상계) 7세의 혼인 관계가 대부분 지금의 장성 주변 출신 名族(명족)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葦南先祖(위남선조) 이전부터 이미 진원현을 중심으로 살면서 近鄕(근향)의 名家(명가)들과 交流(교류)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려후기말엽인 당시 사정으로 미루어 교통.통신이 어려운 위에 농촌 관습이 집성촌을 떠나서는 살지 않았으며 상경하여 官界(관계)에 있다가도 퇴직하면 歸鄕(귀향)하여 監農(감농)하고 後進(후진)을 양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조들의 文籍(문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마당에 譜牒(보첩)에 나타난  配位(배위)의 기록들은 가장 詳考(상고)할 만한 證據(증거)가 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 박씨의 진원땅 定着(정착)의 연대는 대략 고려후기 명종 무렵 이후로 짐작되며 여기에서 珍原古縣(진원고현)을 중심으로 한 丘珍(구진)이나 珍原(진원)으로써 貫鄕(관향)을 삼고 살아온 것이라 생각된다.< 세종14년의 팔도지리지에 박씨가 주성으로 등재되었다.>
     1922년 봄에 밀양박씨들이 주동이되어 밀성대군 등을 모신 遠德祠(원덕사)를 충북 옥천군 이내면 용안리에 세운 바 있었는데 당시 松林(송림)의陽亭公(양정공)南鉉宗(남현종)이 葦南先祖(위남선조)를 恭敬(공경)한 나머지 이사당에 밀성군의 后孫(후손)으로 從享(종향)케 한 적이 있었다. 그리나 우리 문중에서는 이같은 일은 先後(선후)가 맞지 않는 욕된 일이므로 일체 불참한 끝에 1988년 대종회의 결의로 葦南先祖(위남선조)의 位牌(위패)를 撤享(철향)시켜 世系(세계)를 바로 잡은 바 있다. 그 이후 事件(사건)이 연유가 되어都下(도하)
    『한국인의족보.성씨의뿌리』등에 시조 휘진문을 밀양파에 連繫(연계)된 양 간행.유포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부분을 확실히 정리할 겸  장성군 동화면 용정리 도산산하에 시조공 이하6세조의 祭壇(제단)을 묻고 그 경위를 기술하는 6세단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후손들은 勿論(물론) 관심있는 諸賢(제현)의 착오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추기를 부치는 바이다.

▣파별 분포 및 세거지 (珍原 朴氏)

        ◈  5개파의 세거지(世居地)를 살펴보면 박희중(朴熙中)의 세 아들이 9세손으로서 휘생(暉生), 곤생(坤生),

     진생(進生)인데, 휘생(暉生)은 성균관 (成均館) 생원으로 시거(始居)하여 보성(寶城)에서 종파(宗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차자(次子)인 곤생(坤生)은 성균진사 (成均進士)로 장성(長城)의 중파(中派) 파조가 되었으며, 삼자

     (三子)인 진생(進生)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郞)을 지냈으며 장성(長城)의 계파(季派) 파조가 되었다.

     보성(寶城)종파에서는 휘생(暉生)의 아들인 10세손 박문기 (朴文基 ; 進士, 司온署 直長)의 세 아들이 11세손

     으로 흥원(興原) 계원(繼原) 윤원(胤原)인데,장자(長子) 흥원(興原 ; 進士)은 장종파 (長宗派),차자(次子) 계원

     (繼原 ; 生員 昭格署 參奉)은 장중파 (長中派), 삼자(三子) 윤원(胤原 ; 生員)이 장계파 (長季派)의 파조가 되어

     오늘날 5개 파로 모든 종문사(宗門事)가 이루어지고 있다.

       ◈   파별(派別) 거주 분포(分布) 상황(狀況)을 살펴보면,

          ▶ 장종파(長宗派)는 흥원을 파조로 보성(寶城)과 장흥(長興) 지방에,

          ▶ 장중파(長中派)는 계원을 파조로 보성(寶城)과 고흥(高興) 지방에,

          ▶ 장계파(長季派)는 윤원을 파조로 보성(寶城), 고흥(高興), 여수(麗水), 화순(和順), 광양(光陽),

                               장성 (長城),전북(全北) 임실(任實), 경남(慶南) 사천(泗川) 지방에,

          ▶ 중파(中派)는 곤생을 파조로 장성(長城), 담양(潭陽),나주(羅州), 신안(新安)과 전북(全北)의 임실(任實),

                             충남(忠南)의 연기(燕岐), 보은(報恩) 등지에,

          ▶ 계파(季派)는 진생을 파조로 장성(長城), 담양(潭陽), 나주(羅州)와 전북(全北)의 임실(任實)지방에

                            각각 세거(世居)하면서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었으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

                            하면서 도시집중화 현상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현재는 광주,서울 또는 지방도시로 점차

                            거주를 달리하고 있다.

        ◈  통계청 인구조사 자료에 의하면 진원 박씨(珍原 朴氏)는 전국에2000년기준 7,403세대(世帶)(2000년기준),             33,630명(名)(2015년기준)이 산거(散居)하고 있다.  

지역

가구수

인구수

지역

    가구수

 인구수

서울

1,856

7,517

강원

62

301

부산

309

1,491

충북

91

414

대구

40

212

충남 /세종

106

566/175

인천

307

1,684

전북

239

1,155

광주

1,336

5,471

전남

1,553

4,751

대전

95

575

경북

49

291

울산

68

388

경남

126

847

경기

7,604

3,992

제주

24

188

계

가구수 (2000년도기준) 7,403          인구수(2015년기준) : 33,630

 

▣珍原朴氏六世祭壇碑

                                         소재지;전남 장성군 동화면 용정리 233-10 서당산(골)  2004년1월11일촬영  

       

       

 

▣ 碑文(비문) 譯文(역문)

            

         鰲山(오산)(장성예명)읍에서 서쪽으로 십리 남짓한 書堂山(서당산)아래 長柱嶝(장주등)에 땅을 다듬어 神位(신위)를

      만드니 이는 우리 始祖大將軍府君(시조대장군부군)이하 六世의祭壇(제단)이다.삼가 생각컨데 동방의 朴氏는

      신라왕에서 비롯되어 八大君(팔대군)에서 나뉘었다고 하지만 우리 진원박씨는 중간에 昭穆(소목)(사당에신주를모시는차례)

      이 빠져 부군이 譜乘(보승)에 오른 시조가 되었다. 분군의諱(휘)는 進文(진문)으로 고려조때의 대장군의 벼슬에

      이르렀다.아들 諱 孝大(휘효대)는 직위가 大相(대상)에 이르렀고 손자 贇(빈)은 檢校將軍(검교장군)이고 배위는

      진원吳氏로 金吾衛將軍佐石(김오위장군좌석)의 따님이다.증손 諱 成亮(휘성량)은 判軍器監(판군기감)이고 배위는

      전주全氏 元呂(원려)의 따님이다. 현손 諱 瞻(휘첨)은 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壁上三韓三重

      大匡(벽상삼한삼중대광) 守門下侍中(수문하시중) 判都評議使司事(판도평의사사사)겸 判兵曹尙瑞寺事(판병조상서사

      사)右文館大提學監(우문관대제학감)藝文春秋館事(예문춘추관사)領經筵事(영경연사)로益陽伯(익양백)에 봉해졌고

      諡(시)는 忠義(충의)이며 배위는 진원吳氏 檢校軍器監(검교군기감)益(익)의 따님이다. 5세손 諱 洪瑞(휘홍서)는

      嘉善大夫(가선대부) 전라도 병마 절도사이고 배위는 전주 崔氏 松(송)의따님이다.이것이 계승에 실려내려오는

      事項(사항)이고 墓所(묘소) 및生卒(생졸)의 년월과 위 兩代(양대)의 배위.姓氏(성씨)가 모두 전하지 않고 다만 官(관)과

      封(봉)만 기록되었을 뿐이니 文獻(문헌)의 인멸됨이 매우 개탄스러운일이다. 그러나 府君(부군)이 이미 멀리왕가의

      遺緖(유서)를 이어받아 할아버지 아들 손자 三世가 모두 將相(장상)의 직위에 올랐고 충의공은 또 淸要職(청요직)을

      다 거쳐 封諡(봉시)의 恩典(은전)이 뭇 집안에서 벗어났고 절도공이 朝家(조가)의 발탁을 입어 한 지방의 병마 權炳

      (권병)을 맡았으나 이로 보아 累世(루세)에 材器(재기)가 卓越(탁월)함과 德業(덕업)의 성함을 증험할 만하다.

      또 節度公(절도공)의 아들  溫(온)이 일찌이 진사에 올라 구례감무를 맡았고 이분이 낳은 熙中(희중)은 세상에서

      葦南先生(위남선생)이라 부르고 벼슬은 예문관 대제학으로 春亭 下季良(춘정하계량)과는 道義(도의)의 사귐이깊었다.

      浩亭(호정)河崙(하륜)의 문하에 從遊(종유)하였으며 청명과 直道(직도)로國朝(국조)의明臣(명신)이 되어 士林(사림)이

      학림에 제향하였다. 이분이 세아들을 낳았으니 暉生(휘생),坤生(곤생),進生(진생)으로 모두 진사에 올랐다.

      이 뒤로부터 자손이 창성하여 명망과 행의가 서로 이어지고 떨어지지 않고 그 알려진 것도 앞뒤가 서로 이어져

      내려왔다. 장파에 五世孫 文康公(5세손 문강공) 竹川先生(죽천선생) 光前(광전)은 陶山(도산)의高弟(고제)요

      세상이明儒(명유)로서贈諡(증시)와院額(원액)의 恩典(은전)을 받았고 중파는 四世孫 僉正(사세손 첨정)祐(우)와

      五世孫 節度使 承宗(오세손 절도사 승종)이 충과 효로 모두 충열과 良昭(양소)의 贈諡를 받았고 계파는三世孫 淸溪   

      元恂(삼세손청계 원순)과 그의 아들 岐陽(기양)濬哲(준철)이 모두 文學行義(문학행의)가 있어 학림사에 從享(종향)

      되었다. 그외 문하과  행의로 일컬어진 분들과 壬丁倭.胡亂(임정왜.호란)에 창의하여 공훈을 드러낸 분들이 많았는데

      다 기록할 수 없고 생원과 진사에 합격된 분도 모두 五十여분이나 된다. 생각하니 세대는 동떨어지고 난리를 겪어

      六世의 墓城(묘성)이 모두 전해지지 않아 자손이 香火(향화)의 받음을 펴지 못한 것이 수백년 오랜 세월이 되었다.

      이러던 차에 여러 종인들이 이를 개탄하여 마침내 發議(발의)하여 壇(단)을 만들어 제사 지내는 前例(전례)를 가지고

      나에게 禮(예)을 물었다. 나는 삼가 명을 듣고 위연히 탄식해 말하기를 "지금 근본을 등지고 선조를 잊는때에 우리

      宗彦(종언)들이 능히 이성을 말하여 先世(선세)에 이루지 못했던 일을 가지고 報本(보본)의 예를 펴라고 하니

      생각컨데 하나의 後孫(후손)으로 感慨(감개)가 깊다.어찌 예문에 확실한 典據(전거)가 없음을 의논해 말할 여지가

      있으랴 더구나 禮經(예경)에 비묘 遠祖(원조)를 合祀(합사)하는 사당을 없애고 壇(단)을 만든다는 글이 있고 우리

      夫子(공자)가 묘를 바라보고 단을 만들엇다는 설이 있어 후인이 이것을 모방하여 묘소를 잃은곳에 설치한 예가

      가끔 있으니 安東(안동)의三太師(삼태사)와 丹陽(단양)의萬祭酒倬(만제주택)이 그하나인즉 아마 아무런 이의를

      일으키는혐의는 없고 또한 단을 설치한 위치로 부자와 조손은 기운이 서로 통하는 것이니 마땅히 구례공 묘성의

      근처에 설치하여 사당안의 소목 제도를 모방하여 시조의 신위를 서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향하여 이하다섯위는

      序次(서차)대로 부하되 각각 그 자리를 표시하고 함께 配位(배위)를 列享(열향)하여 歲一祭(세일제)를 함께

      올린다면 참으로 神理(신리)에도 맞을 것이다" 하니 모두를 그렇게 하지고 말해 이에 좋은날을 받아 땅을다듬어

      儀式(의식)을 갖추고 단옆에 비를 세워 그사실을 기록하려 하면서 淺學(천학)이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世系(세계)의 源流(원유)와 壇事(단사)의 顚末(전말)을 이상과같이

      기로한다.이 일을 시종 經紀(경기)하는데수고한 이는 洪柱(梧西),貞柱(松谷),琯柱(三水) 諸宗(제종)이고

      정주가 또 전면비문를 썼기 때문에 아래에 내가 연하여 기록한다. 해는 1990.년4월上澣(상한)이다.   

 

▣ 始祖;大將軍 朴公進文 祭壇(대장군 박공진문 제단)        

             

        

 


         진원박씨족보 2019.5.7수정   박민홍 010-2114-3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