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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世;成均進士 諱 坤生,配 孺人淳昌 趙氏 之墓 계보 보기 (성균진사 휘 곤생,배 유인순창 조씨 지묘) 소재지;전남 장성군 동화면 용정리 기산마을 서당산(골)(구례공묘下) 2004년1월11일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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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 諱 坤生墓表 譯文(역문) 故成均 進士 (고성균진사)진원박공 휘 곤생의 묘소가 옛 영광군 (今장성군 동화면 용정리)의 황용리 長承嶝亥坐 (장승등해좌)의언덕에 있는데 配位 淳昌趙氏 智孫(배위순창조씨 지손)의 따님과 雙兆(쌍조)되었으니 祖考進士求禮監務 諱溫(조고진사구례감무휘온)의 묘소 아래를 택한 것이다. 내가 일찍이 감무공의 묘문을 지으면서 世系(세계)를 記載(기재) 하였으므로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考(고)의 휘는 熙中(희중) 그의호는 위남이며 벼슬은 직제학인데 淸雅(청아)한 明聲(명성)과 곧은 節義(절의)로 國朝(국조)의 明臣(명신)이 되어 학림사에 配享(배향)되었으며,비는 영광오씨이다.공의 字號(자호)와 生卒(생졸)한 년월은 모두 전하지 않는데 그가 살았던 시대는 대체로 태종,세종조의 시대였다. 형제세분이 모두 진사요 공은 둘째이다. 三男을 두었는데 謹之(근지)는 진사이고,揚之(양지)와 守之(수지)가 있다. 딸 둘이 있는데 正郞 李守義(정랑 이수의)와金世雄(김세웅)에게 출가했다. 큰아들 손자에 昌柱(창주)는 무과로 縣監(현감)를 지내고 明柱(명주)와 享柱(향주)는 진사로 昌佐(창좌)이고 三房孫(삼방손)에는 松茂(송무)와椿茂(춘무)이다.曾孫(증손)玄孫以下(현손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고 오직 昌柱(창주)와 아들 漢忠(한충)은 무과로 현감이었는데 효행이 있었고 큰 손자 元孝(원효)는 무과로 僉正(첨정)이 되었는데 丁酉年(정유년)1657再亂(재난)에 參戰(참전)하여殉節(순절)하니 兵曹判書(병조판서)에 贈職(증직)되었다. 祐(우)는 무과로 僉正(첨정)이 되어 정유년(1657)에 일본에 포로가 되었으나 21년간을 節義(절의)를 굽히지 않아 禮曹(예조)의諭文(유문)을 받았고 충열이라는 시호는 내렸다. 증손 承宗(승종)은 무과로 절도삭 되어 壬辰年(임진년)1572 임금을 扈從(호종)한 공로로 변조판서에 贈職(증직)되었고 諡號(시호)는 良昭(양소)이다. 이것이顯著(현저)한 분들이고 그밖에도 문학과 행실로 알려진 자가 많다. 공이 살았던 시대가 이미 수백년이 되었는데 묘소에 아직도 묘비를 세우지 못했으므로 이를 세우려고 훈손 玉鉉(옥현)이 그 譜乘(보승)을 갖고와서 글을 청하면서 遺蹟(유적)이 散失(산실)되어 증거 할 수 없음을 恨歎(한탄)한다. 내가 이르기를 "공이 名父(명부)의 아들로 그 遺緖(유서)를 이어받아 삼형제가 職芳(직방)하여 모두 上庠(상상)에올랐으니 그의 才器(재기)가 文章(문장)을 미루어 알겠으며 자손이 계속하여 節義(절의)와 名行(명행)을 이어받아 대대로 바꾸지 않으니 그 貽模(이모)한 垂統(수통)을 미루어 알겠다. 위로 이어받고 아래로 啓導(계도)한 것을 증거할 만 하니 어찌 그 증거할 수 없는 것을 恨(한)하겠는가?" 이것을 기록하여 전할 일이므로 그 譜乘(보승)을 살펴 敍述(서술)하고 銘(명)을 쓰나니 근원이 맑아 능히계승하고 흐르는 물이 盛(성)하여 능히 啓導(계도) 하였으니 훌륭한 공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