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思齋(영사재) 諱胤原齋室(휘윤원재실)      전남 보성군 노동면 상감정동   계보 보기

永思齋記(영사재기)(建立顚末건입전말)

       보성읍에서 서북쪽으로 20여리에 우뚝 솟은 靈峰 碧玉山下(영봉백옥산하)에 보성강이 구비쳐 흘러 山河(산하)가

    靑丹(청단)의조화를 이루어 天然景觀(천연경관)이 수려한 노동의 地勢(지세)는 우리 진원박씨의 『문학과 유풍을

    相傳(상전)할 世居地(세거지)』로 알맞은 고장이다. 조선조 太宗(태종)때 藝文館 直提學(예문과직제학)을 지내신

    葦南先生(위남선생)의 長子(장자) 成均生員(성균생원)인 諱 暉生(휘 휘생)이 보성땅에 始居(시거)하여 一子(1자)에

    三孫(3손)을 두었는데 구로부터 500년간에 보성 장흥 고흥 순천 등지에 後裔(후예)가 3000여호로 번창하였다.

       보성에들어온 조상의 묘와 水山齋(수산재)의 지명이 水多院(수다원)인데 서쪽으로 5리쯤 보성강을 거슬러 오라가면

    아드님 直長公(직장공) 諱 文基(휘문기)와 甘井齋(감정재)가 있고 이곳에서 2리쯤 위 상감정동 後麓(후록)에 季孫(계손)인

    생원 諱 胤原(휘윤원)의幽宅(유댁)이 있으니 곧 우리 長季派祖(장계파조)의 先塋(선영)이다.

       盧洞(노동)입구 廣灘(광탄)에 水山齋(수산재) 甘井齋(감정재)등 先代(선대)의 재실이 있어 齊宿(제숙)에는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였기에 公(공)의 재실을 마련치 못하고 지연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門內(문내)에서 가장 자손이

    閥族(벌족)한 우리 派祖(파조)의 재실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어 오던중 族叔(족숙) 元在(원재)를 爲始(위시)하여

     諸宗(제종)들이 재실 건립을 主唱(주창)하여 1977년봄에 文康公派 宗會(문강공파종회)를 열어 熟議(숙의)하였던 바

    1300여호의 자손임에도 時祭日(시제일)에 雪寒風雨(설한풍우)를 격을 때 先塋守護閣(선영수호각)이  절실함을  공감한

     全宗員(전종원)은 재실의 건립을 합의하고 곧 基金(기금)을 各派別(각파별)로 배정 收合(수합)아여 정성을 다해

    竣工(준공)하니 『永思齋(영사재)』라 이름 짓고 永世欽思(영세흠사)하여 先蔭(선음)을 잊지 말라는여기에 새겼다.

       제실의 규모는 방한간 대청2간 으로 아담하게 건립하였는데 이 役事(역사)에 幹事(간사)는 族叔(족숙)元在(원재).

    東柱(동주) 諸宗(제종)과각파  門有司等(문유사등)이다. 또 特記(특기)할 바는 500년동안 공의 墓城一帶(묘성일대)가

    소유권미제로있어는데 1958년에 밀양손씨문중의 無償讓與(무상양여)로  이전등기를 마쳤으니 이는 우리 전종원들이

    무한한 기쁨이 아닐 수 없으며 不肖(불초)의 微力(미력이 成就(성취)된 것이기도 하다. 이제 齋(재)는 있으되 記(기)가

    없어 여러 종친들의 권함을 뿌리치ㄱ지 못하고 마침 大宗會(대종회)의 主營(주영)으로 宗誌(종지)가 창간되는 계제에

    先代(선대)의 文獻(문헌)을 갖추어 늦게나마 영사재기 건립의 顚末(전말)을 이처럼 登載(등재)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 季冬(계도)_   生元公 十19世孫(생원공19세손) 鎔澤  謹述(용택 근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