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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慕齋(영모재) 樂天 諱萬七齋室(낙천 휘만칠재실) 전남 여수시 율촌면 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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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慕齋記(영모재기) 여천군에서 서쪽으로 江亭(강정)의 양지바른 곳에 우뚝솟은 영모재는 우리 집안 박씨들이 드의 파조이신 暉 萬七(휘만칠)을 추모하는 뜻에서 지은 집이다. 공은 나의 종10세조인 東溪公(동계공)의 자손이요 文康公(문강공)의 玄孫(현손)이다. 보성의 向陽洞(향양동)에서 태어나 자라서 처가를 따라 순천 신촌에 이사하여 살다가 돌아가시니 앵무산 밑 龜島(구도) 亥坐(해좌) 언덕에 장사하였다. 강정하고 거리는 5리가 넘는다. 금년여름 4월 보름에 제각 落成式(낙성식)을 하면서 나를 청해 한잔 같이 하자고 한 것을 내가 일이 있어 낙성식에는 참석못하고 수일뒤에야 올라와 보니 위치가 높고 향남하야 中峰(중봉)이 앞에 엎드리고 매봉과 학봉이그 왼쪽을 擁立(옹입)하여 사람이 손을 모아 揖(읍)한 型(형)이요 팔영산이 남해구름가에 출몰한 것이 은근하여 섬모양 같으니그 경광의 아름다움과 새집의 웅장함에 놀라 쳐다보니 사람의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해준다. 이때에 집안 어른인 允柱氏(윤주씨)가집안 젊은이 몇사람을 데리고 나를 맞이 하였다. 술잔을 들면서 집지은 始末(시말)을 말하기를「이집은 龜島(구도)에 지은 것이 마땅하거늘 그 선조 밑으로 累代 (누대)의 묘소가 이곳에 있고 자손들이 가까이 수십호가 살고 매양 歲祀(세사)때와 일가의 모임에 장소가 마땅치 않아 權道(권도)로 이곳을 잡았지만 마음은 어찌 꺼림찍한 마음이 없으리오」한다. 내가 답하기를 「無妨(무방)한 것이다 그 신을 섬긴 도리는 오직 정성에 있음으로 땅의 원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생각컨데 禮記(예기)에 春秋霜露 (춘추상로)를 밝는다고 한 것은 다만 그 感時(감시)에 슬픈 생각을 말한 것이요 그 땅을 말한 것은 아니니 오직 其所在(기소재)에 따라 그 誠意(성의)를 다할뿐입니다 이제 내가 興感(흥감)해서 탄복한 것은 여러 종원들의 지성입니다. 정성이 없으면 그 많지 않은 자손과 넉넉지 않은 재력으로 어찌 이같이 거창한 일을 해내리오. 생각해보니 오직 학생공께서 우리 집안에 전해온 詩禮(시예)를 이어받아 후세에 貽模(이모)을 내리고 후손들이 대대로 효제하여 고을의 모범이 되고 그 효제를 잘하여 근본을 잊은자가 없었으니 이에 先世貽模(선세이모)의 啓導(계도)함이 있었느니라 여러분들이 여기서 齋宿(재숙)하고 여기 모여서 先世貽模(선세이모)를 돌이켜보고 더욱 힘쓰고 떨어짐이 없으면 永慕(영모)한다는 이집 이름이 장차 엇되지 않을 것이다. 집을 지은 성의가 이처럼 아름다울찌어다」 하니 다들 좋습니다 하고「그대의 말이 우리들 경계한 말만아니요 가히 영세토록 規戒(규계)가 될 말이다」 드디어 나로 하여금 그 말을 써서 記(기)를 만들게 하니 때는 경오년이요 문중 유사는 炯奎(형규),炯梓(형재),鍾元(종원)인데 그말을 들어기록 한자는 廈柱(하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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