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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遇溪記(우계기) 계보 보기 文康公竹川諱光前(문강공 죽천 휘광전 우계기)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감각동 산앙정 옆(2004.9.27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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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기비(죽천선생 우계기 수묵각비) 구암 (우계)각자 우계 기미년(명종 14,1559) 봄에 의봉(宜峯) 남언기(南彦紀)가 나와 함께 대원난야(大原蘭若)를 유람하기로 약속했는데, 내가 집안에 일이 있어(가지 못하였더니) 그뒤 의봉이 열흘 만에 비로소 찾아왔다. 의봉은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선경의 (宣景義)군과 함께 먼저 절 남쪽으로 수백 보(步) < 여섯 자가 1보>쯤 떨어진 곳에 하나의 특별한 구역을 잡아놓고, 내가 오기를 기다려 같이 집을 짓자고 하였다. 나를 보자마자 곧 서로를 도모하기를, "이곳은 두 줄기의 물이 합치는 곳으로 숲과 천석(泉石)이 아름다운데, 좋은 경치를 구경하는 이가 없어 파묻혀 묵어 버린 지 몇 해나 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 이를 나는 매우 애석하게 여기네. 더구나 나와 자네 는 이미 (이곳에서)여름을 지낼 계획을 세웠건만, 절은 허물어지고 중은 몇 명 남지 않았으며 거처할 집은 좁고 낮으니, 쇠나 옥을 녹일 듯 한 무더운 날을 만나면 놀며 쉴 만한 곳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네. 어찌 하루의 수고로움을 아끼려다 삼복(三伏) 의 더위를 먹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곧장 이러한 뜻을 함게 공부하던 동지들에게 알린 뒤, 그곳에 살고 있던 노소(老少)근 30명의 중들을 모두 동원하여, 좌우로 나누어 일을 시작함으로써 그들의 기운을 고무시키고, 말술(斗酒)을 따라서 상으로 주어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하였으며 함께 공부하던 동지 몇 사람도 각각 한 가지 일을 맡아 책임지고 이루도록 하였다. 이에 우거져 그늘을 이룬 풀이나 나무 중에서 제거해야 할 것은 베어내고, 무성하여 보기 좋은 것은 북돋아주고, 바위나 비탈이 잡초로 덮여있는 것은 드러나게 하고, 연못이나 웅덩이가 막힌 것은 소통시키고, 돌을 받쳐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고, 모래를 파내어 맑은 물을 흐르게 하였다. 그렇게 한 뒤에 높은 곳은 저절로 대(臺)가 되고 낮으 곳은 저절로 연못이 되니, 대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그다지 힘을 들인 바 없었다. 큰 시냇물이 절 남쪽으로부터 가로질러 흐르는데 넓이는 몇대의 끌채를 담을 만했고, 작은 시냇물은 절의 뜰을 뚫고 흘러 내리는데 얕아서 발꿈치도 차지 않았다. 모래와 돌은 맑고 깨끗하였으며 경내는 맑고 조용하여 밖에서 보면 보통과 다름이 없지만, 그 가운데에 들어가면 둘레가 겨우 백 보인데도 온갖 경치가 두루 갖춰져 있다. 구석구석 모두 앉을 만하고 보이는 곳마다 시를 읊을 만하니, 이는 참으로 빛을 감추려는 자가 노닐며 휴식할 곳이다. 청소를 이미 끝내고 시험삼아 벗들과 함께 감상하다가 흥이 겨움에 시선을 빼앗겨 오랫동안 한 곳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곳 저곳 두루 돌아다니다 보니 다리가 한가할시간이 없어서, 애써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면 거의 미치광이가 될 지경 이었다.이에 그 중에서 표시할 만한 곳 스무 군데를 골라 이름을 지었는데, 어떤 것은 모양에 따라 짓고 어떤 것은 덕(德) 으로 지어 각각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 곁에 그윽한 오솔길이 작은 시내를 끼고서 무성하게 바람을 머금고 있는 곳을 '운혜'라 하였는데, 실은 절간의 문으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아름다운 경치로) 들어가는 시발점이다. 그 오솔길에는 옛날의 대나무 숲이 매우 성하였으나 중년에 절간의 중들이 가혹한 세금에 시달려 방치한 채 가꾸지는 않고 베어간 나머지 초췌하여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이에 백낙천(白樂天)의 『양죽기(養竹記)』에 따라 우거진 초목을 베어 내고 거름을 끌어와 주니, 얼마 되지 않아 이미 옛 가지는 무성하고 새잎은 싱그러움을 보여 마치 알아주는 이를 만나 감응하는 뜻이 있는 듯하였다. 거기서 남쪽으로 6~7보쯤에 늙은 나무 두어 그루가 있었는데 푸른 등나무가 얼기설기 얽혀 무더위를 받지 않은 곳이 있어 이를 기정(기<오리나무기>亭)'이라 하였고, 전후 좌우가 가지런하고 방정하여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은 곳이 있어 이를 '구정(矩亭)'이라 하였으며, 큰물과 작은 물이 마주쳐 합류하는 곳에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갑자기 솟아있어 이를 예정(汭亭)'이라 하였다. 실제로는 가로놓인 하나의 언덕이지만 위치에 높고 낮음이 있어서 셋으로 나누었는데, 모두 오른 쪽으로는 큰 시내와 닮았고 왼쪽으로는 작은 시내와 닿아서 짙은 그늘과 시원한 바람은 삼복 더위에도 가을처럼 시원하게 했다. 또한 지세(地勢)가 가장 높아서 스무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으로 모두 감상할 만했다. 예정(汭亭)아래의 작은 시내가 '석감(石坎)'이다. 시냇물이 위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니 그 모양은 마치 가마솥과 같고 크기는 사방 한길 쯤 되었는데, 감청색의 차가운 물빛이 맑고 깨끗하여 갓끈을 씻기에 알맞았다. 웅덩이에 가득 찬 물은 돌 솔기에서 흘러 내려와 또 작은 폭포가 되어 깊은 연못으로 쏟아졌다. 돌 솔기의 위아래 바위와 비탈 사이에는 향기로운 창포가 여기저기 돋아나 겨울과 여름을 무성하게 보내니, 청고(淸苦)한 모습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싶을 만큼 완상(玩賞)하기에 가장 기이한 곳이어서'손애(蓀崖)'라 이름을 붙였다. 석감(石坎)의 동쪽 머리에 작은 대(臺)가 우뚝 솟았는데, 북으로는 산기슭과 이어졌고 남쪽으로는 깊은 연못에 닿았으며 서쪽으로는 예정(汭亭)과 마주하여 솟아 있되 조금 약한 곳이 있어 '양대(陽臺라 부르니, 곧 산의 남쪽이요 물의 북쪽 (山南水北)이라는 뜻을 취하고, 또 선경(仙境)을 빌려 이름을 붙였다. 푸른 물결이 새로이 넘쳐 물고기는 발랄하게 헤엄치고, 맑은 달이 물결 따라 흘러 황금이 만 섬이나 된 듯하니, 이는 대(臺) 가운데에서 형언할 수 없는 좋은 경치이다. 양대(陽臺)에서 동쪽으로 10보쯤 가면 이곳이 풍주(楓洲)이다. 시냇가 양쪽 언덕을 따라 푸른 단풍나무가 무수히 서있어 맞닿은 잎사귀들이 어두운 그늘을 만들고, 자욱한 안개가 시내에 끼어 있어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내려올 때에도 해가 보이지 않으니, 바람과 서리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기이하고 사랑스러웠다. 풍주(楓洲)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시내가 흐르는 가운데 여기 저기 흩어진 돌이 서로 기대거나 포개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산도(散島)'이다. 산도에서 건너가면 시내의 남쪽 언덕이다. 편편한 돌 위에 규룡(규<규룡규>龍)이 서린 듯한 나무가 있는데 모양이 의자와 같아서, 기운이 혼미하고 몸이 피곤할 때에 곤을 오므리고 발을 담근채 안석처럼 기대어 있으면, 홀연히 정신과 영혼이 상쾌하게 통하여 고질병이 몸에서 떠나게 됨을 깨닫는다. 정자 위에는 걸터앉은 듯 가로놓인 돌이 있다. 모습이 마치 비석밑의 거북 좌대와 같은데, 그 길이는 사람만 하고 등은 솟았으며 머리는 우뚝하여 장육(臧六)의 형태요 인감(鱗甲: 용)의 형상이니, 비록 솜씨 좋은 장인(匠人)이 정신을 모아 만들었다 해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않을 것이다. 의봉(宜峯)에게 우계(遇溪)두글자를 크게 쓰도록 권하였는데 글자의 획이 마치 서까래와 같았다. 정(釘)을 준비하고 석공을 초청하여 등위에 새겨 놓고 멀리서 바라보니 어슴푸레 대구이일 (戴九履一)의 형상과 같았다. 이는 하늘이 만들고 땅이 숨겨 놓았다가 오늘을 기다렸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기이하고 교묘함이 이와 같겠는가? 그것이 거북이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름을 구암(龜巖)이라고 하였다. 그 아래에 평원(平原)이 기름져 아름다웠는데 스무 명이 앉을만 하였다. 호미로 잡풀을 뽑고 평평하게 만들어 아름다운 초목을 줄지어 심은 뒤 이름을 구원(龜原)이라 하니, 구암(龜巖)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북쪽으로 깊은 연못을 굽어보면서 양대(陽臺)와 서로 마주하는 평원의 서쪽 가에 작은 돌 바위가 있는데, 울퉁불퉁 높고 낮아 무산(巫山)의 12봉과 비슷하니 이것이 바로 '유선봉(遊仙峯)'이다. 손애(蓀崖)에서 유선봉(遊仙峯)을 건너는 사람은 반드시 통진석(通眞石)을 밟아야 하는데 돌이 손애와 서로 이어져 있고 유선봉과는 두어 자쯤 끊어져있다. 유선봉 곁에 작은 대(臺대)가 있는데 단풍나무 한 그루가 쓸쓸하게 서 있어 사랑스럽다. 가을이면 백로(白露)에 취하여 그림자가 맑은 물결에 담기니 이것이 이른 바 '유하대(流霞臺)'이다. 대 위에 어두운 골짜기와 조그만 샘이 있는데 버드나무로 인하여 제방이 되었다. 물을 모아서 연못을 만들고 연뿌리를 심으니 연잎이 비로소 물 위로 나와 둥실둥실 떠 있다. 훗날 꽃이 피면 화산(華山)의 열 발이나 되는 연꽃 한 조각으로 고질병을 치료한다는 것도 굳이 부러워할 게 없으니 바로 이른 바 하당(荷塘)이다. 비류암(飛流巖)은 버드나무 제방의 머리 쪽에 있으니 곧 세 정자(三亭: 기정, 구정, 예정을 말함)의 남쪽이다. 큰시냇물이 폭포가 되어 깊은 연못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물이 불게되면 곧장 유선봉(遊仙峯)과 부딪혀 어지럽게 차 오르고 세차게 뛰어올라 형세가 지축을 뒤흔들 듯하며, 물이 얕으면 구슬을 퉁기고 옥을 내뿜어 길다란 산비탈에 흩뿌려서 손애의 작은 폭포와 마주보고 매달리니, 크고 작은 폭포가 기이함을 다투며 유하대(流霞臺)의 장관을 만든다. 은병암(隱屛巖)은 가장 상류에 자리하여 그 형상이 마치 병풍과 같았는데, 시내의 맑은 경치가 바위에 이르러 숨어 버리기 때문에 은병암(隱屛巖)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시냇물이 흐르는 곳마다 모두 커다란 반석에 구멍이 뚫려 웅덩이가 두세 곳 만들어졌는데, 정자 밑에 이르러 평탄하게 굽이친 곳이 없이 흘러 비류암(飛流巖)으로 쏟아져 내린 뒤에 깊은 연못을 이루었다. 통진석(通眞石)아래에 단아하면서도 무거운 돌이 물결의 중심에 우뚝 서 있으니, 겸가의 시(詩)에 "완연히 물 속에 있는 듯하네"라는 말을 취하여 '완도(宛島)'라고 리음을 지었다. 완도(宛島)아래 흩어져 있는 돌 위에 갈대와 물 억새 몇 떨기가 길 게 자라서 저절로 강호(江湖)의 멋이 있으므로 '위도(葦島)'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 깊은 연못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연못이 비류암(飛流巖)으로부터 산도(散島)에 이르기까지 길이는 몇십발 넓이는 두어 발쯤 되는데, 발도 씻을 만하고 낚시질도 할 만하며 헤엄도 칠 만 하고 자맥질도 할 만하여 하나로 부르기에는 족하지 않다. 이를 합하여 우계라 이름을 붙이니 곧 구암(龜巖)에 새긴 것이다. 만난다(遇)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적막한 물가에서 무료할 때에 흐르는 물을 따라 걷다보면 우연히 시냇가에 이르러 이른 바 뛰어난 경치를 얻게되니, 이는 사람이 시내를 만난(人遇溪)것이다. 처음 천지가 열려 사물이 생길 때에 이미 지형이 뛰어난 곳을 갖춰 놓았건만 광채(光彩)를 감추고 숨긴 지 몇 해만에 비로소 우리들에게 발견되니, 이는 시내가 사람을 만난 (溪遇人)것이다. 천지 사이에 만물은 모두 운수가 있음을 나는 여기에서 분명하게 징험하였다. 그러니 훗날 어찌 또 '못 만나게 될지'알겠으며 또 반드시 '오래도록 못 만남'이 없을런지 알겠는가? 돌에다 새긴 것은 뒷사람에게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훗날 만나는 자로 하여금 오늘의 만남을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름이 이미 정해지니 마음 내키는 대로 벌려 앉아, 경서(經書)를 읽기도 하고 사서(史書)를 읽기도 하고 시를 읊기도 하고 글자를 배우기도 하였다. 글 읽는 소리는 낭랑하고 시냇물 소리는 청명한데 화사한 바람까지 멀리서 불어오니 북을 두드리고 종을 치며 즐길 만하다. 이는 단지 안락을 즐기고 탐하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즐겁게 놀기도 하되 속세를 벗어난 곳에 뜻을 두고, 선가(仙家)에서 말한 삼청(三淸)이란 것을 본떠서 세 정자로 상청 을 삼아 통괄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 의정(椅亭)으로 중청(中淸)을 삼으며, 산도(散島)로 하청(河淸)을 삼아, 먼저 들어간 자는 선생이 되고 뒤에온 자는 제자가 되게 한다. 풍주(楓洲)에서 하청(河淸)으로 돌아가고 하청에서 중청(中淸)으로 오르고 중청에서 상청(上淸)으로 올라가게 하여 모두 절차와 조목을 두고, 속세의 인연을 말하는 자는 비록 선생이라 할지라도 경중(경중)을 가려 중.하청으로 좌천시키되 공부를 독실히 한뒤에 상청(上淸)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한다. 예법을 소중히 여기고 명령을 엄하게 행하여 의관을 단정히 하고 걸음걸이르르 질서 있게 하며 세속의 일을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면, 마음을 맑게 하고 기운을 기르는데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상청(上淸)에 있으면 스스로 처한 곳이 높은 줄을 알지 못하지만, 중.하청에서 우러러보면 두 폭포가 높이 매달려 계단이 끊어지고 있고, 삼베옷이 희고 깨끗하여 그림자가 숲 사이에 비치니, 황홀하여 절로 어지럽다. 과연 우인(羽人)과 선객(仙客)이 배회하고 노니느라 속세의 소식도 접할 수 없는 듯하지만, 그것이 놀이하는 것임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이곳에서) 10년쯤 학문을 닦고 나오도록 한다면, 세속을 벗어난 청허(淸虛)는 배울바 아니지만 풍채와 골격은 절로 세상 사람들과 큰 차이가 날 것이다. 세 살살이는 걱정도 많고 부평초(부평초)처럼 흔들려 흩어지는 것이어서 오랫동안 모여있을 수 없으니, 훗날 서로 추억해보면 기이하게 놀았던 아름다운 일이 틀림없이 마음 속에서 왔다갔다할 것이기에, 그 전말을 적어서 다시 한번 보는데 대비하려고 한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말하기를, "좋은 문장이로다! 좋은 문장이로다! 그 말이 진실하고 화려하여 능히 한 시내의 맑은경치를 먼 훗날 사람의 눈에 밝게 비추어 주었으니, 도학(道學)속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문질(文質)이 이처럼 환히 빛날 수 있겠는가?"하였다. <살펴보건대, 선생의 후선 화석(華錫)이 농암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에 농암이 이 글을 외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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