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양리

지도읍 사무소에서 북동쪽으로 5.5km² 떨어져 있으며,내양 둔곡 송황 적동 가정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리의 동쪽은 바다건너 무안군 해제면과 이웃해 있고 간척으로 형성된 염전과

농경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1896년(고종)지도군이 설치되면서 지도군 군내면의 지역으로

날구지 바깥쪽 되므로,밭날구지 또는 벗테의 안쪽이 되므로 내양, 내양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양리,가정리,송항리,둔곡리,적동등을 합하여 내양리라 해서

무안군 지도면에 편입되었다가 1969년 신안군이 신설되면서 신안군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총면적 10.50km²이다.

 ▶ 외양(나루구지)마을

 

→마을형성; 密陽朴氏  糾正公派 始祖 (밀양박씨규정공파 시조)인 박현의 16世孫(세손)인 박수천의

               6형제중 다섯째인 박만겸이 1600년대 말 충청도 목천에서 거주하다가 이곳으로 들어와

              그의 아들 박율환이 외양에 정착,마을을 형성했다.

→지명유래 ;지도의 관문 역할을 했던 강산나루가 있어서 나루구지라 칭햇으나 내양 밖에있는

                마을이라 해서 외양이라 칭했다.

→전설 :박율환은 박현의 20세손으로 신비즘에 살면선 지나는 사람이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주고

          옷과 신을 만들어 주는 등 덕을 베풀었는데 하루는 눈에서 파란 구슬이 나와 들고 있는데

          잠시 후 직물 장사가 명주를 주고, 유기장사가 그릇을주고,석수장이가 탑을 만들어 주어

          명주에 싸서 그릇에담아  탑에 보관하여 오다 탑을 세우고 제를 지내왔는데

          지금은 구슬은 간데 없고  영당에는 탑과 초상화만 남아 있다.

→유물유적; 趙性敎永生不忘碑(조성교 영생불망비)-1876년(光猪2) 都察使 趙性敎(도찰사 조성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

                 南聖重淸德善政碑(남성중 청덕선정비)-1715년(康熙54)南聖重(남성중)의 신정을 기리기

                 위해 건립.

→특이사랑 ; 신비즘-무안군 해제면 과 連陸(연육)되어 지금은 걸어서 갈 수 있으나 오래전에는

                지금의 신비즘에서 해제면 임수리까지 신을 벗어 들고 다닌다 해서 신비즘이라고 했다

 

▶ 묘두(괴머리)마을

→마을형성;250여년전 이웃마을인 적동에서 거주하던 김해김씨 김산현,김현배 등이 농토를 따라

                이곳에 정착한 후 마을이 형성되었다. 특히 이곳에는 지도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가 있어 수자원이 풍부해서 비옥하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지명유래;마을 지형이 고양이 머리형으로 생겼다 하여  描頭(묘두)또는 괴머리라고도 한다.

 

▶ 가정(가재)마을

→마을형성;杞溪兪氏(기계유씨)가 최초로 입향하였다 하나 자세한 내력은 알 수가 없다.

                그후 밀양박씨 박중매가 1687년 입도하였다.같은해에 조씨도 입도하여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마을지형이 자재 형이라 하여 가재이로 구전되어온 것이 한자어로 가정이라 부르고 있다.

→전설;옥녀봉;옥황상제의 딸이 죄를 짓고 벌로써 지상에 내려와 살 게 되엇는데 어느 가난한 집

                    외동딸로 다시 태어났다가 20세가 되는 해에 돌아오도록 하라는 옥황상제의 명에

                  의해 지상에서 살게된지 18년이 지날무렵 이웃집 도령과 좋아하게 됐는데 약속된

                  20년이 되어 뒷산 봉우리에서 하늘로 올라가 버리자 도령은 옥녀를 못잊어

                  그 봉우리에서  옥녀를 부르다 죽었다 한다. 그후 그산을 玉女峰(옥녀봉)이라 한다.

 

▶ 적동마을

→마을형성;金海金氏(김해김씨)김정희가 240여년전 함평군 대동면 거주하다가

                島嶼地域(도섬지역)을 개척하고자 이곳에 이주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마을뒤에 옥녀봉과 笛對峰(적대봉)이 위치하며 이 마을에 최초  입도한 8대조께서

                마을을 정하기 위하여 방랑하다가 이곳에서 잠이 들어 꿈을꾸는데 옥녀가 술잔을

                들고 피리를 불며 풍악을 울리는 꿈을 꾸어 일어나 보니 지형이 형으로 이곳에

                신선이 올 것으로 믿고  이 마을을 적동이라 했다 한다.

 

▶ 송항마을

→마을형성;300여년전長水黃氏 (장수황씨)황지봉이 함평에서 거주하다가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仁同張氏(인동장씨)장기례도 같은 시기에 함평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현재도 이들 성씨가 주로 거주하고 있다.

                 또 무안세적지 에서는 장수황씨 황원청이  숙정(06?~17?)때 전주 용진면 구덕리에서

                 거주하다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전한다.

→지명유래;마을 주변이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형상이라 하여 송항이라 하였다.

→전설;마을 뒤에 鷹峰山(응봉산)이 있는데 산이 形局(형국)이 매형국이라한다.

            그 산의 나무를 베면 활기를 잃고 재난이 오며 또한 북을 치면 매의 정기가 울려서

             마을이 폐촌이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와 이 마을에서는 북을 치는 일이 없다 한다.

→유물유적;孝子碑(효자비)-故孝子贈參判長水黃公子口口口土之四十年 //已 숙종 39년(1713)

               //已  十一口口口碑의 크기는 높이 130센치,폭70센치,두께20센치 이다.

 

▶ 둔곡(둔실)마을

→마을형성;조선 선조때 豊川任氏(풍천임씨) 임만천이 가원도 철원에서 거주하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이곳으로 피난 온 후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현재는 마을 앞에을 간척으로 메워 농토를 만들었다.

→지명유래;도읍을 정하기 위해 만조시 이곳에 온 선비가 하룻밤을 쉬고난 후 간조가 되어

             물이 없어지자 도읍을 정하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膽谷(담곡)이라했다는 설이 있으나,

             마울의 지형이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형이라 하여 屯谷(둔곡)이라 칭했으면

             芚(둔)자를 쓴 이유는 알지 못한다.

→전설;鐵馬山 頂上(철마산 정상)에 철로만든 말이 있었는데 둔곡,장동,죽곡마을의 사람들이

          돌로 집을 지어 말머리가  자기마을로 향하게 해야 마을이 부자가 된다고 서로 말머리를

         돌렸다고 전해오며 일본인이 가져갔다가 머리가 빠지자 제자리에 가져다 놧으며

          그 철마가 머리 包作(포작)까지 갯벌을 걸어다녀 뻘이 묻어 있었다 한다.

          지금은 철마는 없고 그 산을 철마산이라 한다.

 

▶ 내양(안나루구지)마을

→마을형성;1600년대말 밀양박씨  규정공파 박현의 17세손인 박만겸이 처음 입도하였고

               둘째아들 망환이 내양에 정착하였다.

→지명유래;지도의관문이었던 강산나루 안에 있어 안나루구지라 하였다가 현재는

                내양이라 하고 있다.

→유물 유적;이장용 공적비(1기)두께 25센치,넓이50센치,길이160센치로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와 지도읍 내양리간 연육공사를 추진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81년 건립.

 

◆ 봉리

지도 본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지도읍사무소에서 약 5km쯤 떨어져 위치한다.

또한 이곳은 동쪽으로 내양리와 서로는 바다 건너 임자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서쪽은 삼암복 (해발196m)이 자리하며 북동쪽으로는 큰포작도와 인접하고 있다.

이곳은 본래 지도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써 봉골,봉굴ㅗ는 죽공리 ,신기리,원동,서동,참도

취리지를 합하여 봉리라 해서 무안군 지도면 편입되었으나 1959년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총면적 6.70km²이다.

     

 ▶봉동(봉굴)마을

→마을형성; 400백년전 나주목 지도면 둔곡리에  속하였으며 忠烈公(충열공)의  

                후손인 珍原朴氏 應南(응남)이  최초로 입도 하여 형성하였다.

                죽곡(대실)과 심동 사이에 위치하며 마을 앞에는 신안군에서 가장큰 저수지가

                있으며  읍소재지와는 6Km 떨어져 있다

→지명유래; 마을 뒷산이 鳳(봉)의 形局(형국)으로 생겼다 하여, 鳳洞(봉동)<봉골>이라 한다.

→전설

장군 바위;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는데 300년전 힘센 장군이 살았다고 전해온다.

                장군의 발자국이 바위에 찍혀 지금도 그 형태가 있으며, 바위에서 물이 계속

                흘러 나왔다 한다

새박굽(새박굴);봉황새의 발굽처럼 생겼다 해서 새박굽 이라 한다.

진재잔등(진째잔둥); 해가 없어지는곳이라 해서 진재라 한다.

 

→유물유적

   선창목; 마을 앞이 지금은 저수지이나 오래전에는 배가 드나드는 선창이었다. 지금도

           이곳에는지석묘처럼 생긴 바위 (가로1.5Cm , 세로2Cm 정도)가 있으며,

           그곳에 "川"또는"三"의글씨가 새겨져있다.

 

▶ 심동(깊은굴)마을

→마을현성;250년전 밀양박씨가 내양리 내양에서 깊은골로 들어가 마을을 현성했다.

              북쪽으로 서당골,동쪽으로 봉굴과 인접해 있으며 읍소재지와 6.5km정도

              떨어져 있다.

→지명유래;맨 처음 마을을 형성할  때 산밑 깊은 곳에 집을 지어 살았으모로  심동이라

              하고 깊은골(깊은굴)이라고도  한다.

 

▶ 원동(원굴)마을

→마을형성;250여년전 김해김씨가 처음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심동과  서동마을

             중간에 위치하여 읍소재지와는 6.9Km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지명유래;본래 이 마을이 맨 처음 형성된 마을이라 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곳에는 阮(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잧을 수가 없다.

 

▶ 서동(서당굴)마을

→마을형성;400여년전 정유재란때 남원부사로 분전했던 임현의 20대손인 임경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읍소재지로부터 북쪽으로 7km떨어져 있고

             황금마을과  깊은골 중간에 위치한다.

→지명유래;오래전 마을에 문맹인이 많아 한학을 가르쳤다는 서당이 있었다ㅣ 한다.

              그 후 서동이라 하며 서당골이라고도 한다.

 

▶ 황금마을

→마을형성;약300여년 김해김씨가 이곳에 황금을 캐기 위해 왔다가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읍소재지로부터 북으로 8km 떨어져 있고 해발 200m의 삼암봉이 병풍처럼

               둘려있어  항상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여서 주민들이 화합하고 단결이 잘되는

               마을이다.

→지명유래;삼암봉의 정기를 받아 토질이 비옥하고 오곡이 풍성하여 마을 뒤편에

               금이 나올거라는 금출동이 있어 황금이라 한다.

→전설;三岩峰의山神靈(삼암봉의산신령)-삼암봉의 바위속 작은 굴에 산신령이 살고 있었다.

          이 산에 어린이들이 올라오면 감을 따주는 등 좋은 일이 많이 했는데

         마을사람들이 많이 산에 오르자 노하여 어디론가 살아졌다 한다.

 

▶ 취동(불취)마을

→마을형성;300여년전 신창표씨인 표이매가 맨 처음 이곳이 정착,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뒤편으로는 산이 감싸고 있으나 마을 전면으로 확 트인 바다가 있어

             바람이 매우 매섭다.  본 도의 북쪽 맨끝에 자리하여 서당골과 황금의 중간에

             위치하고 바다 건너편으로 임자면과 이웃하고 있고 읍소재지와는

             8.5km떨어져 있다.

→지명유래;북쪽으로 막힌데가 없이 바다와 마주하고 있어 바람이 불어온는 곳이라 해서

            "吹"(취)를 써서 불취라 했다.

 

▶ 죽곡(대실)마을

→마을형성;약300녀년전 潁陽千氏(영양천씨)가 함평 불암에서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남쪽으로 재를 넘어 장동이 있으며 북쪽으로 봉굴이 있고 읍소재지와는 5k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마을 옆으로 본에서 가장큰 저수지를 끼고 있어 논농사가 주업이되고

            있어 풍요로운 농촌인심을 느끼게 한다.

→지명유래;옛부터 대나무가 무성하여 대실(竹谷)이라 하였다.

→전설;철마산과 기우제-가뭄에 들어 마을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보니  철로된 말이 산봉우리에 놓여 있었다. 하도 기이해서 풍악을 울리며

          고사를 지내니 비가 오고 그해 풍년이 들었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가뭄이들면

           그 자리에서 고사를 지내며 기우제를 지낸다.

 

▶ 칠이지마을

→마을형성;50여년전 김해김씨 김모열씨가 내양지 적동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지도북국민학교가 설립되면서 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뒷산 너머는 봉동과 죽곡이 있고 참도가 마을앞 1km에 위치한다.\

            읍소재지와는 6km떨어져 있다.

→지명유래;처음 7가구로 형성된 마을이라 "칠금지"라고 했다가 후에 칠이지 하고 있다.

 

→마을형성;1906년 밀양박씨 박성운이 최초 입주하였다. 그후 1932년 인동장씨 장태평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연륙되기전 여객선의 기항지로 임자와 낙월면을 잇는 포구였으며 동남쪽으로 적동과

            서쪽으로는 서당골이 인접하였고 읍소재지와의 거리는 7km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지명유래;어의리와 포작도 주민이 거쳐가는곳으로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간다하여 참도라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