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道碑銘 幷序(신도비명 병서)

 文康公 竹川 諱光前(문강공죽천휘광전 신도비)전남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양지마을(2004.9.27촬영)

 

              진원박씨 성지                                       신도비 측면                                            측면

       죽천 박 선생이 萬曆(만력) 정유년(1597) 11월 18일에 세상을 뜨니, 광해군 경술년(1610)에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고숙종 정해년(1707)에는 용산서원의 편액을 내렸다. 순조 갑오년(1834)에는 이조참판 겸 成均館祭酒

    (성균관 제주) 侍講院 贊善(시강원 찬선)을 추증하였으며, 신축년(1841)에는 문강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삼가 생각해 보니, 선생은 師友(사우)간의 淵源(연원)이 바르고 後賢(후현)들의 추앙이 성대하였으니, 모두 국가의

    법전에 실린 儒賢(유현)에게 諡號(시호)를 내리는 조문'에 합당하였지만, 儒生(유생)들이 상소하고 해당 부서에서

    覆啓(복계:임금께 복명함)하여  2백년이나 지나서 비로소 시행되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어찌 국가가 儒賢

    (유현)을 승상하는 법전은 참으로 가볍지 않고 공론은 시간이 오래 흘러야 한층 중해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후손이 여러 선비들과 함께 신도비의 銘(명)을 나에게 지어주길 부탁하였다. 나는 학문이 볼 품 없는

    후생으로서 감히 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지만, 그 간청은 더욱 절실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 일은

    다만 사행에 따라 글을 만들어 앞일을 증거로 뒷사람에게 보일 뿐이니, 이는 기술한 것이지 지은 것이 아니므로

    또한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선생의 휘는 광전이요 자는 顯哉(현재)이며 竹川(죽천)은 그의 호이다. 珍原(진원)박씨는 고려조에

    門下侍中(문하시중)을 지내고 益陽伯(익양백)에 봉해진 忠義公(충의공) 瞻(첨)을 먼 조상으로 삼는다

    4세가 지나 희중이 태어났는데 호는 葦南(위남)이다. 直提學(직제학)벼슬을 할 때 곧은 성품 때문에 執政(집정)

    <나라의 정권을 잡은 사람, 河演)하연을말함>에게 미움을 사, 珍原縣(진원현)으로 물러나 노년을 보냈다.

    이로부터 청렴결백한 절의와 행실이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전하게 되었다.

       文基(문기)는 진사로 直長(직장)벼슬을 하였고, 윤원은 生員(생원)이요. 간은 선교랑이니, 바로 선생의 고조 증조

    조고이다. 아버지 이의는 진사이고 어머니 朗州崔氏(낭주최씨)는 習讀(습독) 命夔(명기)의 딸이다.

       선생은(嘉靖(가정) 병술년(1256) 정월 16일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지녔으며 성품이 총명하고

    단순하였다. 나이 8~9세에 이미 어른다운 몸가짐을 갖추었다. 당시에 忍齋(인재) 洪公(홍공)<이름은 暹(섬)>이

    興陽(흥양)으로 귀양을 왔는데 성생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찾아가 수업하였다.

       홍공의 거처까지 거의 10리쯤 되었으나,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일과를 채우니, 홍공이 가상히

    여겨 더욱 부지런히 가르치고 타일렀다. 홍공이 다시 정승이 되어 선생이 泮宮(반궁)<성균관의별칭>에서 공부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만나보려 하였으나 찾아가지 않았다. 후에 齋郞(재랑)<참봉의별칭>이 되어 비로소 찾아가

    절하니, 대개 그의 본래 操行(조행)이 이와같았다.

       10여 세의 어린나이에 詩文(시문)을 능숙하게 짓자 父兄(부형)들이 과거공부를 익히게 하였으나, 틈틈이 性理書

    (성리서)를 가져와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은 뜻을 탐구하여 부합한 바가 있었다. 이윽고 松川(송천) 梁應鼎(양응정)을

    찾아가 수학하였는데, 당시는己卯士禍(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도학을 말하기를

    꺼리고 대부분 浮華(부화 )< 화려안 문장공부>를 숭상했다. 그러나 선생은 홀로 개연히 분발하여 오로지 爲己之學

    (위기지학)< 자기를 위하는 학문, 곧 도학>에 힘써, 坰菴(경암)韓胤明(한윤명)과 경전의 옛 뜻을 토론하며 힘써 학업을

    돈독히 하였다. 찾아와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암기하여 읽는 것 외에 자기를 수양하는도가 있음을 알려주고 독서를

    권할 때에는 『소학』을 우선으로 삼았다.綾城(능성 )< 지금의 화순군 능주>의 邑宰(읍재)는 선생의 친구였는데

    아리따운 소녀를 뽑아 4~5일 밤을 모시게 하였으나 끝내 곁눈질하지 않았다. 읍재가 탄복하여 말하기를 "자네가 지킨

    절개는 옛 사람에 비해 부끄럼이 없네"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鄭汝立(정여립)을 한 번 보고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다시 볼 수 없으리라" 고 말하였는데, 그후 과연 역적으로 죽임을 당하니 사람들이 그 선견지명에탄복하였다.

    詔使(조사 )< 명나라 사신>가 오자, 判書(판서) 尹毅中(윤의중)은 接泮使(접반사)<사신을 맞아 접대하는 관원>가 되어

    "유생 가운데 문장에 능하고 예의에 익숙한 사람을 한명 골라 從事官(종사관)으로 넣어주십시오"라고 啓請(계청)

    하였다. 마침내 선생을 추천하였으나 선생은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병인년(1566) 겨울에 退陶(퇴도 )< 퇴계이황> 선생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니, 선생이 깊이 권장하고 추켜세웠다.

    詩(시)5수를 지어주면서기대하고 권면함이 간절하였으며 또 『주자서절요』를 주었다. 얼마 후에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도는 넓고도 넓으니 오직 성현들이남긴 교훈을 착수할 곳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 중에서 지극히 절실하고

    지극히 요긴한 것을 구하기는 『주서』보다 앞서는 것이 없을것이네."하였다. 선생은 스승의 훈계를 유념하여

    늙어서도 더욱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선대 유학자들이 논한 理氣先後(이기선후)와 四端七情(사단칠정)의 학설을 절충하여 辨析(변석)하였고, 고금의

    典禮(전례)도 또한 고증하여 학설을 세워 뒷사람으로 하여금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전란에 없이져 전해지지 못하고 단지 문집 몇 권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선생은 지성으로 어버이를 사랑하여 衣冠(의관)을 바르게 차리고 종일 곁에서 모셨는데, 어버이에게 불안한 기색이

    있으면 잠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수십 년간 마음을 다하여 약을 한결같이 家禮(가례)에 따랐도, 젊어서부터

    병이 많았지만 禮制(예제)를 집행하기를 더욱 엄격히 하였다. 끝내 아무 탈 없이 지나니 사람들이 지성스런 효도에

    감응한 탓이라고 말하였다.

       무진년(1568)에 進士(진사)에 합격하였다. 경오년(1570)에 眉巖(미암) 柳公(유공)<유희춘>이 호남을 按察(안찰)

    <지방 괄의 치적과 불법을 살펴 조사함>할 때, 선생이 "어버이를 모심에 지성으로 효도하고 상을 치르면서 예를 다하고

    몸가짐에 법도가 있고 사람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다"고 적어 첫 번째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신미년(1571)에 慶基殿 參奉(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獻陵參奉(헌릉 참봉)으로 옮겼다. 경기전은 全州府

    (전주부)안에 있었는데 예로부터 흔히 娼妓(창기)의 놀이터로 사용되었고 陵寢(능침)에서 邑宰(읍재)와 함께 사냥을

    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선생은 "경기전에는 御眞(어진)이 모셔져 있으니 더럽힐 수 없으며, 능침은 사냥하는 곳이 아니다"하고, 아울러

    물리쳤다. 얼마 안 있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경진년(1580)에는 東氷庫別坐(동빙고 별좌)에 제수되어 한 번 謝恩肅拜(사은숙배)하고 돌아왔다.

    이때 선조 임금께 대를 이을 嫡統(적통)이 없었는데 왕자가 장차 취학하게 되자, 재주와 학행이 純正(순정)한 사람을

    잘 가려 뽑아 사부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선생은 선발되어 師傅(사부)가 되었고 河洛(하락)은 副師(부사)가 되었다.

    강의할 때마다 하락은 많은 글을 읽도록 힘썼고 공은 정밀하게 이해하도록 힘썼다.

       임금이 왕자의 日課(일과)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글 읽는 것만 탐하면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하게 되니, 마땅히

    朴師副(박사부)의강의를 따라야 한다" 하였다. 왕자가 궁중의 일을 말하려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 마땅히 지성스런

    효도를 다하여 삼가 자식의 직분을 행할 뿐입니다. 궁중의 일을 신은 감히 듣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왕자도 또한

    말할 수 없었다.

       계미년(1583)에 伺憲府監察(사헌부감찰)을 거쳐 咸悅縣監(함열 현감)으로 나가,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는 넉 자를 벽에다 써 붙여 놓고, 자상하고 편안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이 모두 부모처럼 친근히

    따랐다. 공은 퇴청하면 몸소 校宮(교궁)< 향교의 별칭>으로 가서 諸生(제생) 들과 道義(도의)를 강론하였다. 이에 앞서

    全州府尹(전주부윤)이 암행어사의 論罪(논죄)를 받게되었는데, 선생이 암행어사와 오래된 친구라 하여 監伺(감사)가

    이를 의심하고 다른 일에 얽어 넣어 狀啓(장계)를 올려 파직시켰다. 선생은 일정을 계산하여 양식을 챙기고

    (그 밖에는 손을 대지 않아) 창고 곡식의 잉여분이 수천 包(포)에 이르니, 사람들은 그 곡식이 허튼 곳으로 돌아갈까

    염려하여 監營(감영)에 보고하고 국고에 저장시킬 것을 청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후임 현감이 어찌 감히 멋대로

    사용하겠는가? 또 (그대의 말처럼 한다면)자기의 공을 자랑하는데 가깝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정해년(1587)에 掌苑署(장원서)< 관직의 명칭은 전해지지 않음>에 제수되었고 이어 懷德懸監(회덕현감)에 제수되었다.

    현에 어떤 왕실의 宗親(종친)이 촌민과 奴婢(노비) 문제로 송사를 벌렸으나 11명의 관원이 바뀌도록 해결되지

    못했는데,선생은 文籍(문적)을 살펴보고 精狀(정상)을 알아 촌민에게 승소판결을 내렸다. 또 監伺(감사)가 어떤

    사람의 촉탁에  따라 과부집 여자를 무고하여 죽이려하였다.선생이 그 원통함을 밝히자 감사가 격노하니 선생은

    시비를 구분하여 강력하게 변론하였다. 감사가 부끄러워하며 승복하였으나, 그 뒤에 災傷御史(재상어사)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돌아왔다.

       임진년(1592)에 섬 오랑캐가 미친개처럼 날뛰니, 선생은 任啓英(임계영)등과 함께 激文(격문)을 띄우고 鄕兵(향병)

    7백여 명을 모집하였다.

       선생은 병이 심해져 任公(임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큰아들 根孝(근효)를 의병 막하의 參謀(참모)로 삼아

    錦山(금산)과 茂朱(무주) 등지를 방어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동궁이 完山(완산)에서 군사를 감독할 때에 선생은

    병든 몸을 이끌고  軍門(군문)으로 찾아가 뵙고, 時務(시부) 10여가지 방책을 아뢰었다.

       뒤에 의병을 일으킨 일로 해서 軍資監正(군자감정)에 제수되니, 선생은 "몸소 행군하지 않고서 헛되이 國恩(국은)을

    받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말하고, 任公(임공)에게 그 虛實(허실)을 변론하게 하였으니 備局(비국)<비변사>이 묻어놓고

    거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자들은 이를 의롭게 여겼다.

       계사년(1593)에 임금이 피난처 의주로부터 서울로 돌아오자, 선생은 소장을 올려 병 때문에 능히 勤王(근왕)하지

    못한 죄를 아뢰었다. 임금은 위로하여 타이르고 잇달아 翊衛司 翊衛(익위사 익위)와 新昌縣監(신창 현감)을

    제수하였으나,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양하고 돌아왔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또 호남을 침범하여 南原(남원)이 함락되니, 많은 선비들이 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선생은 "나는 병이들어 장차 죽겠지만 맹세컨대 왜적과 함께 살지는 않을 것이오"라고 말하고, 副將(부장)宋弘烈

    (송홍렬)을시켜 용감한 병사를 이끌고 곧장왜적의 소굴로 쳐들어가게 하여 (적을)놀라게도 하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의병의 함성이 점차 진동하니 도망가 숨었던 守令(수령)들은 그가 세운 공을 시기하여 막고 나섰다.

       선생은 얼마후에 세상을 떴다. 3년이 지난 기해년(1599)에 동궁이 賻義(부의)를 보내와 비로소 보성의 沙谷(사곡)

    艮坐(간좌)언덕에 장사지냈다. 配位(배위)는 貞夫人(정부인)에 추증된 南平文氏(남평문씨)로 參議(참의)에 추증된

    양의 딸이다. 성품이 온유하고 생각이깊어서 부인의 덕을 두루 갖추었다. 선생보다 한달 먼저 작고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합장하였다.아들 둘을 두었다. 장남 根孝(근효)는 進士(진사)이며 차남은 根悌(근제)인데, 모두 의병을

    도운 공으로 장남은 縣監(현감)을 제수받고,執義(집의)에 추증되었으며, 차남은 參奉(참봉)을 제수받았다.

    손자 春秀(촌수)는 直長(직장)인데 병자호란에 창의하여 左承旨(좌승지)에추증되었고, 春長(춘장)은 進士(진사)이며,

    딸은 崔弘有(최홍유)와 任喜(임희)에게 출가하니, 모두 장남의 소생이다. 春豪(춘호)는 찰방이요 딸은 林曦(임희)와

    朴弘仁(박홍인)에게 출가하니 모두 차남의 소생이다. 증손자와 현손 이 하는대수가 멀어서 다 적을 수 없다.

       선생의 깊은 학문과 큰 덕을 이제 어찌 감히 망령되에 杜撰(두찬)하겠는가? 오직 예전에 선현들이 남긴 말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퇴계선생은"늙고 병들어 실수가 많음을 몹시 부끄러워했는데, 그대의 도움으로 다시 광명을

    얻었다오" 하였고, 河西(하서)金文正公(김문정공)<김인후>은 그의 글을보고 "서로 뒤늦게 알 게 된 것"을

    한스러워하였으며, 玄石(현석) 朴文純公(박문순공)< 박세채>은 『東儒師友錄(동유사우록)』에다 성생의 道學(도학)과

    節義(절의)는 百世(백세)의 公案(공안)임을 모두 기록하였다.

       農巖(농암) 金文簡公(김문간공 )< 김창협>은 선생의 遇溪記(우계기)를 외우면서 말하기를, "좋은 문장이로다! 그말이

    진실하고 화려하니,道學(도학)속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文質(문질 )< 외관과 본 바탕>이 이처럼 환활 수

    있겠는가?"하였고, 邃庵(수암)權文純公(권문순공 )<권상하>은 書院(서원)의 祝文(축문)을 지어 " 학문은 선정에게

    나아갔고 德業(덕업)은 후진 에게 드리웠네. 가정에서 효도하고 우애하여 원근 고을에 規範(규범)이 되었네"라고

    찬양하였으며, 屛溪(병계) 尹文敬公(윤문경공 )< 윤봉구>, 陶谷(도곡) 李文簡公(이문간공 )< 이의현>, 陶庵(도암)

    李文正公(이문정공)<이재>이 모두 墓文(묘문)을 지어 지극하게 들추어냈다.

       선생의 門人(문인)牛山(우산)安文康公(안문간공)< 안방준>에 대해서 尤庵(우암) 宋文正公(송문정공)< 송시열>은

    "남쪽의 선비들이 의지라는 바로서 世道(세도)에 매우 공이 있는 분이다" 라고 말하였는데, 그가 선생의「行將(행장)」

    을 쓰면서 "호남에서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던 분들로 河西(하서)의 학문과 操行(조행), 절의와 문장은 높아서 따를 수 없고 高峰(고봉)의 명쾌한

    의논이나,一齋(일재)의강하고 굳세어 굽히지 않음이나, 眉巖(미암)의 넓은 지식과 많은 문견도 또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나, 실천의 독실함은 우리 선생과 더불어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陶庵(도암)은

   「墓碣銘(묘갈명)」에서 이것을 인용하여 결론을 맺기를, 공과 같은 이는어찌 감히 한 마디 말을 그 사이에

    덧붙이겠는가? 이어 銘(명)을 붙인다.

       상제가 백성에게 내린 속마음은 오직 仁(인)과 義(의)라네 참으로 순수한 기질이 아니라면 뉘라서 그 참된 본성을

    보존하리환히 빛나는박 선생이여 타고난 기품이 매우 뛰어나 하늘의 명과 성인의 도를 어려서부터 발휘하였도다.

    速水(속수)의 참 마음을 더욱 가슴에 새겨실천하니 커다란 근본이 이미 서고 그 도가 곧 생겨났다네 문순공(퇴계)의

    바른 학문을 선생이 전수하였으니 '直(직)'자의 참된 요결은멀리 주자로부터 나왔도다 『소학』과 가례로 기초를

    다져서 늙어서도 더욱 독실하게 삼가 스승의 법도를 따랐네 효도는 시종 변하지 않았고 충성은 죽음을 아끼지

    않았노라고 寒泉(한천)이 찬송하였으니 여덟글자로 다 표현한 것이라 仁(인)이나 義(의)에 대해 선생은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역대 임금께서 포상하여 관작을 올리고 시호를 내렸도다 이 비를 무덤길에 세워서 내려주신 은총을 빛내고

    내가 銘文(명문)을 아로새기니 영원토록 부서지지 않으리라

 

 

         --숭정(崇禎)291년 무오년 (1918) 11월에 後學(후학) 담양(潭陽) 田愚(전우)가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