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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陽齋(봉양재) 諱萬佑齋室(휘만우재실) 전남 장흥군 장평면 갈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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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陽齋記(봉양재기) 우리집은 10세이하로 선조의 재각을 미처 짓지 못하고 묘소의 거리도 각처에 계심으로 사정과 형편이 어려워 힘을 펴지 못하고 집안도 적고 勢(세)도 고단함으로 어느덧 금일에 이르도록 계책을 세우지 못했다가 많이 혼자 생각해 보니 그럭저럭 기회만 보다가세월만 지나 버리게 되면 마침내 이루지 못하고 맺힌 한을 풀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이에 사묘년 봄에 수칸의 집을 松林(송림)이우거진 옛터에 다짓고 시원한 대청과 약식으로 설비하였으며 담장도 둘러 쌓았고 지붕도 이은다음 정성드려 선조의 제향을 받들며종족들을 모여 놓고 잔치를 베풀며 즐기게 되었다. 부모 봉양하며 농사 짓고난 여가에는 들어앉아 그속에서 독서도 하고 嘉賓(가빈)과韻士(운사)들도 때로 모여서 글을 노하고 문장을 청하며 거문고를 타고 휘파람도 불며 뜻에 맞게되니 또 한해가 지나서 이미 재실의 이름에 명칭이 있어야 하겠고 명칭만 있을 것이 아니라 기문도 없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이름하기를 봉양재라 하였으니 봉미산의남족 이라는 뜻이며 그 사실이라고 쓴 것은 거기에 多少(다소)의 곡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4세이하는 집안에서 제를 모시지만 5세이상은 묘에서 제를 모시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는 것이며 누가 변동할 수도 없다.그러나 나(璂鉉기현)의 사정은 심히 부득이한 점이 있으니 8세를 각히 다른곳에 모셔 놓고 단신으로 받들려 하니 극히 분주하기만 하고 사당을 세우려 해도 세대가 이미 넘었으며 가족들을 나누어서 모시자고 보면 內外(내외)의 제관이 미비하였다. 禮(예)에맞지 않는 禮(예)는 군자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나 제사는 결국 폐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날짜를 잡아 歲一祭(세일제)를 여기 봉양재에서 모시게 되었으며 일을 겪어나가다가 구차하고 곤란하게 됨에 마땅히 교훈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고여기에 거쳐하면서 課農(과농)하여 제수를 장만하고 독서를해서 禮(예)를 강론하면 아마도 금일보다는 더 진전이 되어서 후세에 자손들은 또한 원칙을 찾을 것이고 예를 갖추며 구습을 그치게 될 것인데 세상에 혹자는 나의 情勢(정세)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마도 방자하다고 꾸지람을 받을까 걱정됨으로 대략 서술하여 알게하노라.
--歲在巳卯八月 後孫 璂 鉉 謹記( 세재사묘 8월 후손 기 현 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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